역사적으로회자될 화재의기록
11월은 '불조심 강조의 달'이고 11월 9일은 '소방의 날'입니다.
11월은 추운 날씨로 난방기구 사용이 많아지고 대기도 건조해지면서 화재에 대한 경각심이 더더욱 필요한 시기이지요.
불이 얼마나 강한 파괴력을 지녔는지는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 있어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주택 몇 채, 건물 몇 채가 아니라 도시를 태워버린 악명높은 화재가 있습니다.
생생한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시지요.
세계 3대 화재로 알려진 것이 서기 64년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 1657년의 도쿄 대화재, 그리고 1666년 런던 대화재입니다. 그 중에서 근대적 소방시스템을 탄생시킨 런던 대화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하는데 올해 2016년은 런던 대화재 발생 350주년이기도 합니다.
런던 대화재는 1666년 9월 2일 새벽 2시에 런던교 근처 푸딩 레인의 빵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녀가 실수로 낸 불이 주변의 목재 건물로 번지면서 큰 화마로 변해버렸습니다.
결국 이 불길은 5일간 지속되어서 런던 도시 전체 건물의 85% 이상을 소실시켰습니다.
처음 불이 났을때 빨리 진화를 했다면 이 정도의 큰 피해를 만들지 않았을텐데요,
이 대형 화재도 사람들의 안일한 대처가 더 화를 키운 점이 있습니다.
당시 런던에는 지금처럼 체계적인 소방시스템은 없었지만 민간인들이 조합의 형태로 꾸린 민영소방체계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런던 대화재의 발단이 되었던 빵집은 그 민영소방조합의 회원이 아니었던 관계로 소방업자들이 출동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런던시에서도 빨리 대처하여 화재 주변의 건물들을 폐쇄하고 해체하여 더 이상 화재가 확산되는 것을 막았어야 하는데 새벽에 일어난 화재에 대해서 런던 시장은 당일 저녁이 되어서야 화재 주변의 건물 해체를 명하여 초기 진화를 놓쳤습니다.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은 자연의 힘이었습니다.
동쪽에서 강풍이 불어와서 화재가 도시 서쪽으로 급속도로 퍼지게 만들었죠.
또한 당시 런던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제대로 지은 벽돌집보다 판자집 수준의 목재집들이 많았던 것도 피해를 키웠습니다.
결국 이 대화재로 런던의 상징은 Saint Paul 대성당을 비롯하여 87채 교회와 1만 3천여채의 집을 불태웠습니다.
사망자는 최종적으로 10명 미만으로 보고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너무 강력한 화재로 인해 시체가 녹아내려 구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설과 당시 정부에 등록되지 않았떤 다수의 도시 빈민들이 누락되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당시 런던에 상주한 인구에 대해서 50만 명이라는 추정도 있고 노숙자만 7만 명이 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어 실제 사망자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대형 참사가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유명한 예언자인 노스트라다무스가 일찍이 예언을 했다는 점이지요. 노스트라다무스는 다음과 같이 예언을 남겼습니다.
20의 3배에 6을 더한 해에 런던은 불타 정의로운 자의 피를 요구하도다,
고대의 여인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그와 같은 많은 전당들이 소실되리라
노스트라다무스는 이탈리아식 연도표기법을 사용해서 연도의 끝의 두자리만 기록에 남겨 두었던 거죠,
'20의 3배에 6을 더한 해'는 66년이고 실제로 화재는 1666년에 발생하여 그의 예측이 맞았던 것입니다. 놀랍죠?
런던 대화재는 뼈 아픈 상처를 남겼지만 복구 과정에서 화재 방지를 위한 체계적인 방안을 만들어냈습니다.
우선 건물은 벽돌 또는 돌로 짓게 하는 석재 건축법이 생겼고 화재 확산 방지를 위해 테임즈 강 연안에 집을 짓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도시 건축과 관련하여 매연 및 화기를 발생하는 공장을 이전시키는 계획 등결국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하고 20세기에야 현실화 되었지만 화재예방과 환경을 고려한 도시계획이 많이 제안되었습니다.
또한 소방차를 갖춘 체계적인 소방 시스템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으며 현대식 화재보험회사가 설립되면서 화재에 대한 대비가 강화되었습니다.
런던 대화재가 가져온 예측하지 못한 결과는 런던 대부분의 쥐가 타죽게 되어 1665년에 발생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일으킨 흑사병을 종료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19세기에 발생한 화재 중 악명 높은 화재는 바로 시카고 대화재입니다.
대화재는 1871년 10월 8일 오후 9시에 데코벵가 137번지 울리어리라는 사람의 집 헛간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화재 원인은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올리어리 집 헛간에 있던 소가 램프를 발로 차서 화재가 일어났다는 설과 사람들이 모여 도박을 하다가 램프를 떨었뜨렸다는 설이 많이 돌아다녔으나 모두 낭설로 판명되었습니다.
3일간 계속된 이 화재로 300명 가까이 사망하고 10만 명 이상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습니다.
시카고 중심부의 9킬로미터 지역이 초토화되었고, 오페라 하우스, 법원 등 주요 건물이 다 타버렸습니다.
대략 도시의 3분의 1의 건물이 전소되었다고 추정합니다.
화재가 이렇게 커진 이유는 시카고가 '바람의 도시'로 유명한 것처럼 강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2개월 이상 거의 비가 안와 건조한 상태에서 화재가 발생하였고
도시 중심을 향해 강한 남동풍이 불어 쉽게 불길을 퍼트렸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건물뿐만 아니라 도로, 보도까지 목재로 만들어져서 불이 길따라, 건물따라 쉽게 번져나갔습니다. 초기에 진화작업을 하려고 소방관이 동원되었지만 잘못된 장소로 출동한 관계로 초기 진화를 놓쳤고
곧 불길은 거세어 져서 시카고 강을 건너 상수도 시설까지 파괴하여 화재 진압은 더더욱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화재 이후 재건은 신속히 진행되어 19세기 후반 시카고가 급속히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재건의 시기에 건설은 시카고 성장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철골공법, 신건축소재 활용 등 새로운 건축공법이 다각적으로 시도되었고 고층건물이 다수 건설되면서 마천루의 스카이라인이 형성되었습니다.
양적으로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우수한 건축물이 즐비하게 들어섰습니다.
건축사에 한 획을 긋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루이스 설리반 등의 유명 건축가들이 폐허가 되어 빈 공터를 세계 건축의 중심지로 변모시켰습니다.
이로써 대화재 이후 10여년 만에 시카고는 근대 건축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시카고는 건축학도가 꼭 가봐야 할 도시로 지명되고 있으며
윌리스 타워(시어스 타워), 존 행콕 센터 등 유명한 건출물이 계속 새로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미국 동부 펜실베니아 주의 센트럴리아라는 작은 도시는 1962년에 일어난 화재가 아직도 진화되지 않고 50년 넘게 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센트럴리아는 작은 탄광 도시이었습니다.
석탄 매장량이 많아 20세기에 도시는 석탄으로 성장하여 인구 2,000명의 소도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962년 매립지를 청소하다가 불이 났고 그 불씨가 지표면 아래의 석탄층으로 옮겨붙으면서 화재는 도저히 진압이 불가능한 사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처음 매립지에 불이 났을 때에 보이는 불만 끄고 방치하였습니다. 하지만 불길은 며칠 후에 다시 일어났고 그때도 번번히 물호스로 불길만 껐고 매립지에는 계속 쓰레기를 매립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에 땅 속으로부터 불길이 일어나면서 미국 광산국이 전문가들을 동원하여 화재를 진압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진압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바뀌었습니다.
센트럴리아 지하에는 엄청난 양의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기에 불을 쉽게 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예측되기로는 앞으로 250년간 탈 수 있는 양이 매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무연탄의 성질은 처음에는 불이 잘 붙지 않지만 일단 타기 시작하면 잘 끄기 어렵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지하에서 지속적으로 연료인 무연탄이 공급되는 상황이어서 불을 잠재우기 어려웠고
지표면 아래에 미로처럼 이어진 광맥을 따라 화재가 번지기에 접근하기 용이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도 또 다른 어려움이었습니다.
또한, 화재는 땅속 깊이 9킬로까지 타들어가고 평방 15 제곱킬로미터 면적이 타고 있어 그 방대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화재를 진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습니다.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서 1979년에는 주유소의 기름 탱크 주변 온도가 77도로 올라가 위험이 감지되었고
지면 아래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와 가스로 사람들은 구토 증세를 보였고
1981년에는 땅이 갈라지면서 12세 소년이 지하 24미터 구멍에 빠졌다가 간신히 구출되는 사건이 발생되는 등 주거가 불가능한 상태로 이어졌습니다.
이에 미국 정부는 4,200만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여 주민 전체 이주를 진행하게 됩니다.
이로써 1981년까지 천명이 넘던 주민 수가 2005년에는 12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센트럴리아의 악몽은 매립지를 탄광 지역 위에 만들기로 정한 때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쓰레기 매립지에는 지속적으로 가스로 인한 자연 발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매립지 장소를 논할 때, 반대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립지 바닥에 비가연성 자재를 깔고 쓰레기를 매립하면 안전하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결국 매립지가 형성된 것입니다.
이제 센트럴리아는 유령도시가 되어버려 사람들은 떠나간 상태에서
아직도 도시 여기저기에 불기둥과 가스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곳이 영화 '사이언트 힐'의 배경이 되고 다수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개되면서
거주민은 거의 없지만 구경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화재를 소개해드렸는데,
세 화재 모두 상황적으로, 환경적으로 여러 요인이 결합되면서 쉽게 진압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안에는 모두 사람들의 안일함과 부주의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불은 조심, 또 조심이겠지요!
https://en.wikipedia.org/wiki/Centralia_mine_fire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Fire_of_London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Chicago_F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