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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바깥 Dec 31. 2016

산다는 건 신비한 축복 - 2016년 한 해 정리

https://www.youtube.com/watch?v=gchebU-ZOQE

임인건 - 바람이 부네요(Vocal.박성연)
산다는 건 신비한 축복 / 마음을 열어요 그리고 마주봐요 / 처음 태어난 이 별에서 사는 우리 손 잡아요

 연말에 각종 미디어에서 ‘올해의 ○○○’를 꼽는 것에 시큰둥했다. 변하는 것은 없는데 쓸 데 없는 부산을 떠는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나도 매듭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간단히 정리해야지 했는데 항상 그렇듯 점점 길어졌다.      

    


올해의 사람들 : 새로이 만나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참 많았다. 번개와 밍글을 많이 했다. 일을 시작하고, 트레바리와 같은 책읽기 모임에도 나가고, 각종 공부하는 모임도 여기저기 나가고, 그 밖에 곳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도 다시 연락이 닿아 만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감사한 순간들이었다.    

 풀빛에 둘러싸여 선선한 바람을 맞는 게 너-무 좋다. 관계라는 건 꽤 신기해서 때로는 그동안 별말 섞지 않았던 이들과 더욱 많은 수다를 떨게 된다. 또 사람마다 겪게 되는 여러 변화의 단계를 거쳐 유독 특정 시점에 나눌 이야깃거리가 더욱 풍성해지기도 한다. 반대로 지금 시점에 만났더라면,이란 생각을 들게하는 지난 인연들도 있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생각이지만, 구체적인 얼굴들과 결합될 때 매 만남의 순간은 새로워지고, 또 달라질 수 있게 된다. 지난 인연을 지난 인연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의 만남 : G와 H. 둘 다 이미 알던 사이였지만, G는 새로이 만났고 H는 떠나고 만났다.

(H) 대학 입학 이후 사랑하고 빚진 공동체가 많다. 각각의 공간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틀렸다. 나는 비로소 너와 내가 공유했던 관계와 영역을 체감한다. 지난 인연의 사람들과 조금이나마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네 덕이었음을 깨닫는다. 항상 그렇듯 깨달음은 조금 늦고 마음은 더욱 아프다. 많은 처음을 함께했고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기도 했다. 보다 유연해지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모습이 반가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순수한 내면을 마주할 때마다 좋았다. 지금까지의 만남보다 앞으로 함께 나눌 이야기가 더 기대됐던 친구였다. 섣불리 이해할 수 없다거나 가벼이 이해하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겠다. 여전히 많은 것들을 잘 모르겠다. 그저 그 순간에 짊어졌을 짐의 무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나는 너란 친구이자 선배이자 동료를 만날 수 있어 참 감사했다. 그곳에서 다시 좋은 친구 만나길 빌게. 오늘도 수고했어, 부디 편히 쉬길 바래     


올해의 여행 : 울릉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충동적으로 떠났다. 고립될 수 있는 곳으로 가고팠다. 푸른빛과 고요함에 다시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올해의 나들이 공간 : 한강반포공원. 여름밤 수없이 많은 술과 만남을 740 버스와 9호선이 교차하는 이 곳에서 가졌다.     

Image from 즐


올해의 술집 공간 : 당산과 연남동. 당산은 친구의 부름 덕에, 연남동은 달빛부엌을 비롯해서 내가 추천하여.     


올해의 집회 공간 : 광화문 광장과 청운동. 정말 많은 사람들을 오며가며 만났다. 맥락은 다르지만 God의 '니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가사가 맴돌기도 ㅎㅎ   

 

올해의 등반 : 북한산. 어느새 자연이 좋아졌고, 피는 속일 수 없구나 같은 생각도 했다.  


올해의 세금 : 텝스. ^^l ....     


올해의 삽질 : KBS 한국어 능력 검정시험을 봤다.     


올해의 순삭 : 여름. 더위는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고 기억도 다 앗아갔다... 그나마 손수건을 장만했다.     

으레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으면 곧잘 힘도 나지 않는 법이다. 하루에 하는 생각의 절반 이상은 더위와 관련된 것이었다. 오늘도 덥겠네, 이 옷을 입으면 땀이 덜 날까, 이 버스는 왜 이리 에어컨이 약할까, 땡볕에 식사를 굳이 나가서 해야하나, 동선을 어떻게 잡아야 가장 덜 더울까, 담배 피우는 사람들 사이에 낑겨 밖에 나오니 사우나 같다는 생각 , 운동을 끝내고 또 땀이 비오듯 흘러 씻어야겠네, 약속은 되도록 저녁에 잡기 등등... 머릿속은 더위에 관한 것으로만 가득 채워진 채, 햇볕을 맞아 인상을 찌푸리거나 햇볕을 피해 고개를 숙인 채 다녔던 것 같다. 오늘은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쁘고, 오랜만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계속 바라보고, 산책도 나섰다. 이동하면서 더 이상 덥다는 생각이 아니라, 활자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날씨에 이토록 반응하고 변하는 나를 보니 왜 매년 여름에 관한 기억이 지워졌는지 알 것 같으면서 가을이 기다려진다.          


올해 많아진 것 : 눈물. 글을 읽고, 영상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문득.


올해 많이 한 생각 :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진 게 참 많다는 생각.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갚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겠다는 생각.

올해의 걱정 : 병원에서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염증 진단을 받고 노심초사하고 술도 안 마셔야지하고 결심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냥 마신다.     


올해의 한숨 : 우물 안 개구리로서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다는 자각과 그동안 헛되이 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규칙이나 공정과 같은 가치를 중시하던 나를 떠올리면 그동안 헛되이 살았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이런저런 책들과 문학을 찾아읽으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되뇌인다. 나는 얼마나 관념 속에 살았는지, 인간은 얼마나 취약하고 또 그래서 폭력적으로 되는지, 누구든 쉬이 얕보기엔 얼마나 내가 작은지, 세상은 똥이지만 비관만 하기엔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또 존재하는지.



올해의 문구 : 그럴 때마다 되새긴 말이 있었다. "인간이 지리적, 사회적, 지적 공간 안에서 답답해졌을 때는 한 가지 간단한 해결책이 그를 유혹할 우려가 있다. 그 해결책이란 인간이라는 종의 일부에 대해서 인간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것이다.(레비 스트로스)"   

   

올해의 어그로 : 엘리베이터에 비친 의욕 제로의 내 모습을 보고 500일 썸머에서 조셉 고든 래빗이 등장한 씬이 떠올랐다고 말했다가 욕을 쳐묵쳐묵


올해의 와인 : 베린저, 나이츠 밸리 카버네 쇼비뇽 2012     


올해의 술 : 일품진로 & 발렌타인 30년산     


올해의 극호 : 똘끼 있는 사람들이 좋았다. <본 투 비 블루>의 쳇 베이커 같은.     


올해의 바람 : 내가 또라이까지는 못 되더라도 보다 유연한 사람은 되어보자.


올해의 소비 : 도쿠리&잔을 비롯해서 온갖 알라딘 굿즈를 겟하고 책을 덤으로 받았다...     


올해의 시 : 류근 <축시>.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올해의 목소리 : GMF에서의 혁오. 녹는다 녹아     


올해의 잘한 결정 : 헌혈은 못하니, 장기기증이라도. & 글쓰기 모임 시작.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게 된 계기 中)
"논문 쓸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막상 쓰는 게 너무 싫으니까 리딩만 열심히 하면서 일하고 있다고 믿는 것. 모든 글에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쓰지 않고 자료 조사만 열심히 하면서 '난 일하고 있어..' 라 스스로 위로."

일 년여 넘게 텍스트를 끊임없이 꾸역꾸역 밀어넣기만 했다. 텍스트의 총체가 곧 나라는 생각에서였지만, 제대로 소화하고 흡수한 것이 없었기에 남은 것은 멍한 느낌, 모르겠다는 생각, 그리고 피로였다. 최근 글쓰기 연습을 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내가 뱉어낸 글은 그저 둥둥 떠다녔다. 의자에 앉아 자신만의 세계관 하에서 뭉뚱그린 글들이 싫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말하지 못했다.

     

올해의 한마디: My daddy, “힘들지는 않아, 니가 있잖아”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공고로 진학하셨고, 만 35년째 공장에서 일을 하고 계신다. 서로 다른 풍경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화제는 날씨와 안부 언저리를 맴돌고, 많은 경우 남는 것은 1분 미만의 통화기록이다. 계속되는 교대근무와 점점 늘어나는 추가근무 속에 아버지는 그나마 술로 스트레스를 푸시는 듯하다. 예전에는 건강 걱정에 이런저런 잔소리로 말렸으나, 언젠가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묵묵히 잔을 받고 다시 따르는 거라 생각하고 있다. 평소 조용하신 아버지는 알코올과 함께 조금씩 말문을 트셨다. "일이 많지만 나는 힘들지는 않아, 니가 있잖아" 올 한 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하지만문재인은문제가있어서안되고 #안철수는철수해야하고 #이재명은제명되어야하니 #반기문이잘할거같다는이야기에벙찜



올해의 문제의식 : 땡○피아 공화국 or 전문가 거버넌스의 붕괴 속 권력·이익을 좇는 게 자기계발이 된 시대 -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와 은성 PSD의 계약, 옥시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각종 연구용역을 발주하고 채택하는 과정, 백남기 농민 외인사-병사 논란, 그리고 최근 드러난 ㄹ혜-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까지.

구의역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의 유가족은 매일 장례식장을 찾아온 시민들에게 절을 올렸고, 추모객들은 이에 맞절을 했다.

  관련 글은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293894990638017&id=100000525857011 
http://v.media.daum.net/v/20161008164557831     


올해의 글 : 김영하 “광장에서 우리는 서로의 희망이었다” 매주 새로이 마주하게 되는 광화문의 풍경과 감정을 활자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 글을 접하는 순간 그런 생각을 말끔히 접었다.

http://v.media.daum.net/v/20161113175605133     

 인간은 희망이 있을 때 가장 너그러워진다.(...)광장에서는 모두가 불빛이 된다. 하나의 불빛이 발광하며 다른 불빛에게 희망을 암시한다. 내가 타인에게서 희망을 볼 때, 타인도 내게서 희망을 본다. 점과 점이 선으로 연결되며 거대한 불빛이 된다. 분노가 희망이 되는 마법이 거기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희망은 어떤 결과로 돌아올까. 우리는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한다.



올해의 열일 : 구글 안드로이드 독과점 문제    
 

올해의 책 & 영화 : 아직 못 본 게 많아서 2월까지 읽고 보고... 쿨럭


올해의 배우 : 이 역시 2월까지 기다려봐야하지만, 아직까지는 <룸>의 잭 역을 맡은 제이콥 트렘블레이. 여우주연상 연기 보러 갔다가 남우주연상 감을 봤다.


올해의 음료 : 알로에. 누군가는 나보고 아재 입맛이라 했다. 왜지?


올해의 군것질 : 버터와플, 애플쨈 쿠키, 쫀득쫀득 참붕어빵. 입맛 참 안 변한다.


올해의 멍때림 : 예비군 무려 5일의 시간. 순삭.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나마 마지막 날은 날씨가 좋아서 흐뭇해라 했던 기억.     

아무 일도 하지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걸 잘 못하는 나에게 예비군 훈련은 매번 신기한 경험을 선사해준다. 터럭만 한 의욕도 없이 그저 멍-때리고, 다른 사람의 말도 몽땅 다 흘려듣게 된다. 전날 하루종일 정신없이 일하고 저녁 때는 쉴새없이 수다를 떨어서인지 이런 고요함이 의외로 반가웠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정임에도 으레 불만투성이인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사실 좋은 날씨 덕이다. 선선한 바람과 일렁이는 나무와 하늘을 그저 쳐다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는 축구선수들이 날씨 탓에 영국에서 타 리그로 이적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날씨에 좌우되는 기분을 이해하지 못한 채 스스로 단단해야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나도 파란 하늘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8월 말 한 지인이 주변 사람들의 포스팅으로 보건대 휴가보다 맑은 하늘이 행복에 영향을 더 미치는 것 같다며 우리나라도 환경에 신경쓸 이유가 생겼다는 말이 떠오른다.


올해의 깨달음 : 나는 꽤나 관념적인 사람으로 살아왔음을. 한 해의 경험들 속에서 드문드문 생각할 때가 있었고, 영화 <누에치던 방>을 보며 확실히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https://brunch.co.kr/@scintiller/23     


올해의 캐릭터 : <굿와이프>의 나나(김단 역)... 원작의 칼린다를 살리면서도 본인만의 색깔로 소화.

 굿와이프는 자율주행자동차 사고의 책임 문제, 검색엔진의 알고리즘 조작, 유튜브 영상의 저작권, 비트코인 등과 같은 최근 이슈로부터 정치 문제에까지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동시에 TV에 새로운 여성상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가장 매력적인 드라마이다. LA타임즈의 한 칼럼에서는 최근 미국 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들의 경계를 넓혀나가는 현상은 [굿와이프]에 빚을 지고 있다며, “결국, 모든 르네상스에는 모나리자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올해의 정주행 : 브레이킹 배드 다섯 시즌. 겨울에 잉여잉여하며 끝없이 봤다. 제시를 탐탁치 않아라하는 나를 보며 이대로면 좋은 부모가 되긴 글렀다는 생각도 했다.

                    

올해의 희망 : 말과 글이 무력하지 않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탄핵 가결 이후 국회의사당 주변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노래가 울려퍼졌다. 지난 수년 간 말과 글의 힘을 회의케 하는 상황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그저 활자로만 존재했던 언어들이 다시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
각자에게 아로새겨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감각이 비단 정치 이슈 외에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부터 자리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말과 행동의 학습된 무기력에서 벗어날 때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하는 것들이 생긴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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