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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의바깥 Jul 29. 2017

영화 <덩케르크 Dunkirk>를 보고

영화 세계의 감각적 공간을 확장한 위대한 반전영화

"모두 죽어가는 세상 아이가. 병원에서 죽지 않더라도 매일밤 공습으로 죽어가는 거야. 아지매 한사람 불쌍타 캐봤자 전혀 소용없는기다." 스구로는 만일 인간의 죽음에 냄새가 있다면 그건 분명 이 어두운 방의 악취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엔도 슈사쿠, 『바다와 독약』에서)

 특별한 사건은 우리의 시간, 공간, 감각을 모두 뒤바꾼다. 한국전쟁에 관한 구술사 증언을 읽을 때 모든 것은 생존이라는 당면과제 앞에 부차적일 뿐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떨어지는 포탄, 적의 추격에 어머니는 앞장서서 도망갔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비로소 고개를 뒤돌렸더니 보이는 것은 저 멀리 자기를 쫓아오는 어린 아기였다는 대목.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고 당연했다는 이야기. 한참이 지난 뒤에야 무안함에 나온 멋쩍은 웃음. 문명과 제도의 껍데기를 벗어나 지금 상상할 수 있는 범주 밖의 날 것 그대로를 마주하게 되는 체험으로서 전쟁.


 영화 <덩케르크>를 통해 1940년 당시의 시공간을 다녀온 기분이다.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이나 극대화된 잔인함·폭력성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33만 명이나 탈출했다는데 저 인원이 전부인가, 배는 충분한 게 맞나, 저렇게 적은 비행기로?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어떻게 당시 상황이 전개된 것인지 스토리라인이 약하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전지적 시점을 포기한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영화는 성공했다. 상부의 어떤 결정으로, 우연히 떨어진 포탄으로, 마침 그 자리에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옆사람과 생사가 엇갈리는 전선. 가히 목숨 값이 티끌만도 못한 개인의 시선으로 전투의 단면을 담아냈기에 더욱 공포스럽고 생생하다.


 인류애가 아니라 단지 탈출선에 먼저 타기 위해 부상병을 데리고 뛰었고, 구출되기 위해 죽은 이의 군번줄을 대신 걸고, 만조를 기다려 간신히 좌초된 배에 숨어있었더니 밖으로부터 총알이 내리 꽂히고, 떨어지는 적의 포탄에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엎드리며 내가 아니길 바라는 것뿐이고, 기껏 힘들게 온갖 고난을 겪고 배에 탔더니 잠수 미사일에 침몰하고, 다행히 먼저 탈출했더니 뒤집어쓴 기름에 불이 붙어버리고. 이렇게 일의 앞뒤를 바라보지 못하고 주변 양옆을 볼 새 없이 모진 일이 나에게만 닥치는 듯하니 아군 파일럿에게 "니들 공군은 대체 뭐한 거냐"라고 말할 수 있는 거다.

 시시각각 터지는 폭탄과 죽음 속에 남은 것은 오직 살고자 하는 즉각적인 반응뿐. 여기에 어떤 별도의 서사가 필요한가? 놀란 감독은 그렇게 자신만의 스타일과 연출만으로 전쟁을 체험케 한다.


 이 영화는 75% 이상이 IMAX 카메라로 촬영된 만큼 IMAX 상영관에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극찬을 하는 이유도 기존 영화 세계의 감각적 공간을 확장한 것을 넘어 새로운 영화 개념으로 나아가는 어떤 가능성을 엿봤기 때문일 테다.


 다만 영화 관람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테다. 덩케르크를 체험했다면 인간 동물의 잔혹성과 야수성 앞에 남는 것은 지친 몸과 마음일 테니. 생존이 곧 승리라는 정치적 수사는 희미하게 들린다. 위대한 반전영화에서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마주하니 그저 처연하다.

토다는 말할 수 없는 피로를 느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스구로에게 설명해보았자 아무 소용 없다는 씁쓸한 체념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난 그만 내려갈란다."
(엔도 슈사쿠,『바다와 독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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