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겨울 바다는 푸르다 못해 시퍼런 칼날 같다.
그 차디찬 수평선 너머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위로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휩쓸어가기 위해 당도한다.
내 안에 어둡고 무거운 생각들을
모래사장에 하나둘 나열해 본다.
치우지 못한 부채감, 스스로를 향한 날선 의심
암막 커튼 뒤에 겹겹이 쌓아온 정체된 공기들
그것들이 파도의 흰 포말 아래로 잠긴다.
차가운 물결이 발목을 적시고 지나갈 때마다
모래알 사이사이 박혀 있던 고집스러운 슬픔들이
비릿한 바다 냄새를 품기며 먼바다로 휩쓸려 나간다.
쓸려 나가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흐름이다.
그 무거운 기분들이 파도의 결을 타고
깊은 수렁 아래로 가라앉는 것을 목도한다.
바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의 비루함을 통째로 삼켜서 그저 수평선을 넓힐 뿐이다.
파도가 물러간 자리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젖은 모래가 남는다.
바스러지고 흔들리는 것이 생의 본질이라 해도
그 파도의 쓸림을 견뎌낸 자리라면
어디선가 날아온 이름 모를 씨앗 하나 정도는
단단히 뿌리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바다는 여전히 무겁고 차갑지만
그 무거움에 내 우울을 보태고 나니
비로소 나의 숨은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