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지용 Sep 15. 2018

낭만의 역사 #3 기자가 된 이유

함께 일하는 사람이 좋았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좋았다

살면서 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물류를 전공한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기업 취업을 준비했다. 가능하면 전공을 살리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남들과 비슷했던 평범한 사람이다.


특별하고 싶은 오기 때문이었는지 물류기업에 가기는 싫었다. 이커머스 업체의 물류팀에서 일하고 싶었다. 나에게 있어 가장 가깝고, 친숙한 물류가 이 쪽이었다. 왠지 물류기업보다 이쪽이 더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어떤 소식을 접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이게 인생의 변곡점일 수도 있겠다. 아마존이 예측배송(Anticipatory Shipping) 특허를 공개했다는 소식이다. 방대한 소비 데이터를 기반으로 고객이 주문하기도 전에 주문발생 예상지역에 재고를 배치해 빠른 배송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심지어 고객이 상품을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상품을 보내버린다. 맘에 안들면 반품하란다. 이만큼 쿨할 수가 없었다.


예측배송에 문화가 보였다


예측배송에 적합한 품목들을 생각해봤다. 공연, 음반과 도서, 패션 브랜드 같이 팬덤이 형성된 물건들이 떠올랐다. 이런 물건들에는 문화가 녹아있다. 얼마 전에 수만명의 대기인원이 몰리며 서버가 터져버린 HOT 콘서트처럼. 문화가 녹아있는 상품이라면 사전 데이터를 가지고 어느 정도 팔릴지 예측할 수 있다. HOT 콘서트의 비극은 수요예측이 실패했거나, 잠깐 밀려 들어오고 끝나는데 돈들여 서버를 증설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거나. 둘중 하나가 만든 파극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시 만나던 친구가 또 다른 힌트를 줬다. JYJ의 팬이었던 이 친구는 내가 보기엔 이해가 되지 않는 소비패턴을 보였다. 수만원에 달하는 한정판 야광봉에 돈을 쓰고, 줄을 서가며 브로마이드가 낀 음반을 구매했다. 사실 나도 그랬다. 롤플레잉 게임 <창세기전> 시리즈의 열성팬이었던 나는 제작사인 소프트맥스(Softmax) 게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회사의 다음 작품인 마그나카르타를 별다른 생각 없이 구매했는지 모른다.(마그나카르타는 소프트맥스의 흑역사로 평가 받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두 가지였다. '소비자'와 '데이터'. 이 두개를 가진다면 내가 바라마지 않는 '문화물류'라는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교과서엔 없는 공격적인 물류다. 물류는 비용감축?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다.


취업준비와 미디어


국내에 아마존이 들어와있지는 않았기에, 당장 내가 진로로 생각할 수 있는 국내업체는 몇 안됐다. 최우선은 이베이코리아(지마켓, 옥션)였다. 그 다음으로 커머스플래닛(11번가), 아이마켓코리아(인터파크)가 뒤를 이었다. 제대한 이후 쿠팡, 티켓몬스터, 위메프와 같은 소셜커머스가 한창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런 곳도 눈여겨봤다. 사실 쿠팡 정도는 그냥 넣으면 들어가겠지라고 하는 근자감도 있었다.


난 이 업체들이 어떻게 물류를 하는지 잘 몰랐다. '소비자'와 '데이터'를 가지고 있으니 물류는 그 다음으로 생각했다. 온라인으로 상품을 파는 이커머스니까 배송은 어떤 방식으로든 낄 수밖에 없으니 큰 걱정은 안했다.

이 시기에 이베이코리아 인턴을 지원하고 떨어졌는데, 아마존 이야기만 잔뜩 했던 것이 화근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족으로 원서에 첨부하는 사진으로는 셀카를 넣었다. 난들 뭔 상관이냐고 했는데 다들 미쳤다고 하더라. 이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신입사원 원서였다.


당시 내가 구독하던 물류잡지가 CLO였다. CLO에는 이커머스 물류에 대한 콘텐츠가 상당히 많이 실려있었다. 내가 가고싶었던 기업 중 하나인 11번가 물류팀장이 연재하는 콘텐츠는 단연 매력적이었다. 편집장 표현을 빌리자면 중후장대한 기업물류와는 조금은 거리가 먼, 그것보다는 물류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기업들의 이야기가 물류잡지에 소개된다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때마침 CLO가 대학생 대상 인턴기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확실히 끌렸다. 난 이커머스 업체에 들어가고 싶었고, 관련된 아티클을 찾는 것은 취업준비생의 숙명이었다. 기자가 뭔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언론사니 아티클 이상의 고급 정보를 얻어 취업에 도움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거기에 운이 좋으면 내가 가고 싶은 분야의 사람들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싶기도 했다.

그렇게 '문화물류'를 주제로 아마존 이야기를 풀며 자기소개서를 썼고, CLO 대학생 인턴기자에 합격했다.


고대하던 만남, 그리고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어떤 행사가 끝난후 이커머스 업체 물류 실무자들이 모인 술자리에 편집장이 나를 소개해준다고 데려가준 것이다. 11번가, 인터파크, 알라딘... 내가 가고 싶었던 이커머스 업체의 물류팀장들이 잔뜩 모인 자리였다. 편집장이 말문을 열었다.

이 친구가 그쪽 회사로 가고 싶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 중 한 명이 말꼬리를 받았다. 대형 이커머스업체의 물류센터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내가 이 회사에 지원한다면 면접관으로 올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 넌 여기서 뭘하고 싶은데?


갑자기 면접모드로 변했다. 당황스러웠다. 어떻게든 뭔 말이라도 해야된다.아마존이 불라불라. 예측배송이 불라불라. 데이터가 불라불라. 이걸 가지고 새로운 물류를 하기에 적합한 곳이 이커머스업체 불라불라... 뭔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횡설수설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돌아온 답변. 난 지금도 그 한 마디를 잊지 못한다.


우린 그런거 안하는데?


시간은 야금야금 지나갔다. 1차 술집은 2차로, 홍대모처에 있는 클럽 지하의 룸까지 이어졌다. 이름도 생소한 술병이 수차례 오고가고, 시끄러운 음악이 귓구멍을 간지럽힌다. 그렇게 새벽이다. 한 분, 한 분, 집으로 가는 길을 배웅했다.


토닉워터를 탄 보드카가 이렇게 씁쓸했던가. 나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남은 것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회사와 약속한 인턴기간도 끝났다. 확실히 얻은 것은 있었다. 내가 몇 년 동안 준비했던 것들,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들은 한국의 이커머스 물류팀에서 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그들이 하는 것은 여타 물류 업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창고 레이아웃을 뒤집고, 문제없이 상품을 출고되게 하는 것. 그런 와중에 한정된 자원 안에서 비용을 감축하는 것. 그게 물류팀의 일이다. 기대가 컸던만큼 실망도 클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편집장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 계속 함께 일하지 않겠냐고. 연봉은 다른 업체들에 비해 부족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앞에 있는 택배업체만큼은 챙겨준다고. 생각지 못한 제안이었다. 살면서 누구에게 이렇게 인정받은 적이 있었던가. 내색은 안했지만 정말 고마웠다.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결정은 굉장히 빨랐다. 함께 일하는 사람이 좋았고, 사람을 만나는 이 일이 좋았다.


욕심이 하나 더 생겼다. 누군가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물류가 아름답든, 아름답지 않든, 포장되지 않은 사실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물류를 전공한 친구들, 선후배들은 많다. 이들이 5년뒤, 10년뒤, 15년뒤. 바꿔나갈 세상을 보고 싶었다. 그들과 함께 성장하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난 기자가 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