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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신 Scott Park Jun 27. 2020

습작소설 - 어느 날에 얻은 자유

미니 습작소설

별일 아니려니 했다. 며칠 전 남자 친구 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 주 일요일에 함께 등산을 하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다른 약속이 없기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존과 사귄 지는 일 년쯤 되었다. 그의 유머스럽고 쾌활한 성격이 맘에 든다. 그는 싸이클링, 수영, 패러글라이딩 등 각종 야외 스포츠를 좋아한다.


약속한 대로 일요일 오전에 기차역에서 존을 만났다. 기차는 한참을 달려 시골의 조그만 간이역에 도착했다. 기차역 바로 옆으로는 넓은 강이 흐르고 있다. 보트 몇 척이 여유롭게 강 위에 떠있다. 기차가 멀어지자 도시에서 들리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마치 온갖 소음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 것 같았다.


존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좁은 등산로가 가파르게 이어졌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숨이 차 왔다. 존은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성큼성큼 걷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한발 한발을 내디뎠다.  커다란 바위에 도착하자 존이 말했다. “수고했어, 제인. 오르막은 이제 끝이야.”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돌렸다.   


이제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낯선 새소리와 벌레소리가 들려왔다. 가끔씩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존과 내가 땅을 딛는 발자국 소리만이 더해질 뿐이었다. 파아란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느리게 흘러갔다. 이 길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늦어지는 모양이다. 우리 둘을 빼고는 등산객이 아무도 없었다. ‘이런 자연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니.’  


구름이 걷히고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햇빛 아래서 거의 두 시간을 걸은 모양이다. 얼굴은 물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구름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까 보이던 뭉게구름은 모두 사라지고 흔적조차 없었다. 


갑자기 앞 쪽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존이 조금만 가면 폭포가 있다고 얘기했다. 존에게 말했다. “야호, 시원하게 발을 적실 수 있겠네.” 존은 살며시 웃기만 했다. 폭포 소리가 점점 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폭포에 도착했다. 7 미터쯤 되어 보이는 폭포에서 물이 시원하게 떨어졌다. 폭포 앞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있었고, 그 주위를 나무가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존은 폭포 옆쪽에 있는 바위로 다가가더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속옷마저도 훌렁 벗더니 바로 웅덩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제인에게 외쳤다. “제인도 들어와. 얼마나 시원한 지 몰라.”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눈 앞에서 벌어진 일에 할 말을 잃었다. 온몸은 땀 투성이었다. 수영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수영복을 챙겨 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영복을 챙겨 왔어야 했는데.’ 아주 어릴 적에는 알몸으로 물놀이를 했었다.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고 난 이후 지금까지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었다.  


존이 다시 한번 물속으로 들어오라고 외쳤다. 맘 속에 갈등이 일었다. 물속에 온 몸을 담그고 싶은 욕구와 부끄러운 마음이 맞섰다. 오늘 다른 등산객은 단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 곳은 시골의 외진 등산로인 모양이다. 존에게 내 쪽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았다. 천천히 옷을 하나씩 벗어 바위에 올려놨다. 마침내 알몸이 되었다. 부끄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서둘러 웅덩이에 뛰어들었다. 온몸을 폭포의 시원한 물이 감쌌다. 수영복을 입고 헤엄을 칠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해방감을 느꼈다. 존과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마치 다섯 살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제 물 밖으로 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사십 대 쯤으로 보이는 커플이 등산복을 입고 폭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순간 얼어붙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존이 물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커플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여자가 대답했다. “그러게요. 날이 더워서 수영하기 참 좋은 날씨네요.” 남자가 덧붙였다. “폭포가 멋있네요. 우리는 가던 길 갈께요. 둘이 좋은 시간 보내요.” 분명 그 커플은 존과 내가 알몸인 것을 알아챘는데도 뭐라고 하지 않고 폭포에서 멀어져 갔다. 


폭포 옆 바위 위에 수건을 깔고 존과 함께 나란히 앉았다. 예전에 수영하고 물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젖은 수영복의 축축한 느낌이 너무 싫었다. 오늘은 그 축축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젖은 몸이 햇살에 마르는 느낌이 좋았다. 바람이 불면서 온 몸을 간지럽혔다. 알몸인데도 부끄럽다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커져만 갔다. 폭포에서는 세차게 물이 떨어지고 하늘은 더욱 파래져갔다. 시간이 멈춘 듯한 우리 둘만의 온전한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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