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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신 Scott Park Jun 29. 2020

추억의 양은 도시락

1970년대에 다닌 초등학교 (그때 당시에는 국민학교로 불림) 시절이 떠오른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 다가오면 교실에 난로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조개 모양으로 생긴 조개탄이라고 불리는 갈탄을 땠다. 갈탄은 질이 떨어지지만 가격이 제일 저렴한 석탄이다. 이삼 년이 지나고 나서는 연탄난로로 바뀌었다. 겨울에 난로를 때도 난로 주변만 따뜻할 뿐, 여전히 교실은 추웠다. 그 추위를 견디게 해주는 유일한 희망은 난로에 데워먹는 점심 도시락이었다.


2교시가 끝나면 각자 책가방에서 양은 도시락을 꺼내서 난로 주변에 갔다 놓았다. 주번을 담당하는 친구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졌다. 난로 주변에 수북이 쌓인 도시락을 점심시간 전에 골고루 잘 덥혀 놓는 것이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때 한 반의 학생은 60명이 넘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은 4교시 이후이지만 주번은 3교시부터 열심히 도시락을 데워야 했다. 주번은 양손에 목장갑을 끼고 난로 위에 도시락을 차곡차곡 쌓았다. 아래에 있던 도시락들이 다 데워지면, 난로 옆으로 빼놓고 새로운 도시락들을 위로 올렸다. 교실에는 참기름 속에서 김치가 익어가는 고소한 냄새가 점점 번져갔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얘기하는 도중에 힐끗힐끗 내 도시락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 재수가 없는 날이면, 내 도시락이 채 데워지지 않았거나, 아님 너무 일찍 데워서 식어버리기도 했다. 4교시가 끝나갈 무렵 내 도시락이 난로 바로 위에 있는 날은 아주 따끈따끈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쥔 날이었다. 나와 친한 친구가 주번인 주에는 확실하게 덥혀진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내 금색 양은 도시락은 곱빼기 사이즈였다. 보통 도시락보다 약 한배 반 정도 되는 큰 도시락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채 30분이 지나지 않아서 다시 엄마에게 먹을 것을 찾던 시절이었다. 겨울의 도시락은 항상 김치볶음밥이었다. 도시락의 맨 아래쪽에는 김치가 를 깔려있다. 그 위에 참기름을 뿌려져 있다. 밥은 꾹꾹 눌러 담아져 있다. 재수가 좋은 날에는 그 위에 달걀 프라이가 올라온다. 어쩌다가는 멸치볶음이 있기도 했다. 양은 도시락은 뚜껑이 벗겨지지 않도록 보자기에 싸서 책가방 맨 아래쪽에 놓았다. 양은 도시락 생각을 못하고 책가방을 매고 뛴 날에는 교과서와 공책들이 김치 국물로 염색되기 마련이었다. 햇빛에 말려도 새 학년이 되기까지는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4교시가 끝나는 종이 치는 순간 모두 난로가로 몰려들었다. 주번이 도시락을 나눠줬지만 성질이 급한 녀석들은 자기 도시락을 먼저 집어갔다. 자리에 거꾸로 앉아서 뒷줄에 앉은 친구들과 도시락을 함께 먹었다. 꼭 한 두 명은 커다란 숟가락만을 들고 교실을 순회했다. 친하거나 만만한 애들로부터 한 숟가락씩 뺏어먹는 것이었다. 

 

그렇게 양은 김치 도시락을 함께 먹던 친구들은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한국에 가거들랑 친구들과 함께 70년대 분위기의 새마을식당에 들러 추억의 양은 도시락을 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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