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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신 Scott Park Jul 10. 2020

나의 커피에 대하여

개인용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었다. 1987년 대학교 1학년 때 프로그래밍 숙제가 나오면 학교 전산 실습실로 달려가야 했다. 반복문을 이용해서 1부터 100까지 더하거나, 피보나치 수열을 구하는 문제 등 알고리듬을 구현하는 숙제였다. 그때 전산실에는 IBM 4341이라는 중형컴퓨터가 있었다. 이 컴퓨터 하나에 전체 학생들이 연결해서 사용했다. 늦게 가면 자리가 꽉 차있게 마련이었다. 손으로 열심히 써 온 프로그램을 타이핑하고 결과를 보기 위해 엔터키를 누르면 바로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간단한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최소 5분은 기다려야 했다. 엔터키를 치고 나서 친구들과 함께 전산실 밖에 있는 커피 자판기로 향하곤 했다. 100원을 넣고 밀크커피 버튼을 누르면 종이컵이 딸깍 내려오고 위잉하면서 커피가 만들어졌다. 커피 한 잔을 여유 있게 다 마시고 자리로 돌아가면, 에러 메시지가 떠있기 일수였다. 하지만 황금비율을 자랑하는 자판기 커피의 달콤 쌉쌀한 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쏘이 플랫 화이트 (Soy Flat white)를 마신다. 누군가는 말한다. 커피의 맛을 제대로 느끼려면 우유나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에스프레소나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한다고. 근데 나는 한약 같은 커피는 싫다. 우유가 듬뿍 들어간 부드러운 커피가 좋으니까. 옛날에는 라테를 마셨는데 라테보다 거품이 적고 우유맛이 진한 플랫 화이트를 한 번 마셔보고 나서는 그 매력에 빠졌다.


그러다 5년 전쯤 페이스북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젖소가 새끼를 낳고 나면, 암송아지는 우유 생산을 위해 고이 길러진다. 하지만 수송아지는 하등 쓸모가 없기 때문에 몇 달 키우고 나서 바로 어린 송아지 고기로 도축된다고 한다. 그 사진에는 평원처럼 넓은 곳에 큰 개집 같은 게 가로 세로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 개집마다 안에 송아지 한 마리씩 있는 것이었다. 단기간에 수송아지의 살을 찌우기 위해서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련한 인간의 생산성 강화책의 결과였다. 충격을 받았다. 그 날 커피에 넣어 먹는 우유를 두유(Soy milk)로 바꿨다.        


호주의 카페에는 아무리 커피 메뉴판을 들여다봐도 아메리카노가 없다. 아메리카노를 먹고 싶으면 롱블랙 (Long black)을 시키면 된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아메리카노와 롱블랙의 제조 순서가 정반대이다. 에스프레소 위에 뜨거운 물을 부은 게 아메리카노, 뜨거운 물 위에 에스프레소를 부은 게 롱블랙이다. 에스프레소의 얇은 거품인 크레마를 즐기기 위해서는 롱블랙을 마셔야 한다.


로스팅한 지 얼마 안 된 원두커피를 사다가 직접 원두를 갈면 온 집에 커피 향이 번진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더욱 향이 진해진다. 간 원두를 종이 필터 위에 놓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한 두 방울씩 떨어지는 원두커피도 좋다. 원두의 커피 맛도 맛이지만 집안에 퍼져있는 향을 느끼며 행복에 잠긴다. 느리게 만들어지는 커피처럼 인생도 잠시 느리게 간다. 옛날에 그랬다는 얘기다. 지금은 그냥 카페에 가서 남이 만들어 주는 커피를 사서 마신다.  




커피 향을 맡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을 보고 나서 첫 번째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입 안으로 커피의 따뜻함, 부드러움, 약간 시면서 쓴 맛이 느껴진다. 첫 번째 한 모금을 후루룩 급히 마시기에는 너무 아깝다. 천천히 마신다. 첫 번째 한 모금은 다시 오지 않는다. 마치 첫사랑처럼.


코로나 사태로 인해 계속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아침에 딸과 팔짱을 끼고 집에서 카페까지 약 15분 동안 걸어가서 테이크 어웨이 (호주에서는 테이크 아웃 대신 이 말을 쓴다)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돌아온다. 우리의 손에는 일회용 컵 대신 머그컵이 들려 있다. 커피도 좋지만 산책을 하며 딸과 소소한 얘기를 하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 코로나가 가져다준 소확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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