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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신 Scott Park Oct 27. 2020

밀포드 트레킹 : 아, 이제 살았다  (Day 3)

당신이 기존에 쓰신 글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글을 퇴고해 주세요

퇴고후 글:


오르막은 더 가팔라져서 발은 점점 무거워지고 숨은 더욱 차 올랐다. 오늘의 최고봉인 해발 1,154 m의 맥키넌 패스에 거의 다 도착한 듯 했다. 영어단어 pass 에는 지나가다는 의미 이외에 고갯길이라는 뜻도 있단다. 고갯길마다 패스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지그재그 형태로 난 길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발을 잘못 디디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리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갑자기 센 바람이 불어왔다. 일행 중의 한 자매님이 판초우의를 쓰고 있었다. 그 센 바람에 판초우의가 확 들춰지며 몸이 휘청거렸다. 아찔한 순간이 지나갔다.  


내 신발 속 양말은 흠뻑 젖은 지 오래였다. 팬티도 젖기 시작했다. 방수용 바지가 맘에 드는 게 없어서 '안 입어도 괜찮겠지' 하며 사지 않았는데 후회 막심이었다. 계속 불어오는 칼바람에 손이 찢겨나가는 듯 했다. 레인코트의 소매를 늘려서 양 손을 소매 안으로 넣고 등산 스틱을 움켜줬다. 조금 낫긴 한데 여전히 손이 시렸다. 레인코트 안의 웃옷도 흠씬 젖었다. 레인코트도 이렇게 계속 내리는 비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배낭이 더 무거워졌다. 온몸은 덜덜 떨렸다. 배에서는 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아이C, 춥고 배고프다.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더니.' 자만심이 있었었다. '해발 3,210 m의 안나푸르나 푼힐 전망대도 갔다 왔는데, 해발 천 미터 조금 넘는 이 곳쯤이야.' 하지만 쉼 없이 내리는 비와 칼바람에 그 자만심은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인간이 제 아무리 에베레스트에 깃발을 꽂는다 해도,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한갓 미천하고 초라한 존재일 뿐이다. 내 평생의 등산 중에 제일 고생스러웠다.          


일행의 다른 분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60대 중후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한 부부, 판초우의의 주인공이자 오르막 길이 쥐약인 자매님, 일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도저히 등산 연습을 할 시간이 없었던 내 아내. 이 분들이 나보다 훨씬 더 고생스러웠으리라.  


마침내 밀포트 트랙을 발견한 맥키넌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보였다. 기념비고 나발이고 사진도 안 찍고 지나쳤다. 밀포드 트랙의 최고봉인 맥키넌 패스의 정상을 표시한 이정표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 없이 터덜터덜 지나쳤다. 산 정상이라 바람은 여전히 세찼다. 유일한 관심사는 바로 앞에 있는 대피소였다. 바로 눈 앞에 대피소가 보이는 데 막상 걸어보니 너무 멀게 느껴졌다. '아, 신이시여.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마침내 대피소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선 등산화, 양말, 레인코트와 위아래 젖은 옷을 벗고, 마른 반바지와 반팔로 갈아입었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건네 준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 이제 살았다.' 그리고 배낭에서 마른 과일과 너츠 믹스 한 봉지를 꺼내 함께 나눠먹었다. 우리 부부가 마지막이었다. 일행중 한 사람도 문제없이 모두 다 잘 도착했다. 모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진짜 말 그대로의 "대피"와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원래글:

https://brunch.co.kr/@scottpark/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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