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당신 방에 있던 한 가지 물건에 대하여 써주세요. 단 그 물건의 입장에서 당신과 대화를 나눈다고 상상하고 글을 써주세요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떠올린다. 내 방에 어떤 물건이 있었는지. 선물로 받은 로봇 장난감, 책상 위에 놓인 일 단짜리 책꽂이, 숙제로 매일 써야 했던 일기장? 그래, 이게 있었지. 겉은 진한 빨간색과 노란색이고, 속을 펼치면 그 속으로 빨려 들었던 것.
안녕, 나는 계몽사에서 나온 '컬러판 어린이 세계명작'이야. 총 10권짜리 전집이지.
네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생하다. 책을 좋아하는 네가 난생처음으로 받은 책 선물이었지. 이 전집을 사달라고 오랫동안 엄마한테 조르고 졸랐지. 결국 집으로 배달되어 온 전집을 처음 본 너의 눈가에는 눈물이 핑 돌았지.
그때는 일반적으로 전집류의 책을 서점에서 사지 않았지. 책 세일즈맨들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집집을 방문해서 판매하고 매달 월부로 돈을 받아갔지. 서민들이 일시불로 사기에는 전집류가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거든. 너의 부모님도 가정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았으니 분명 월부로 책값을 내셨을 거야.
그 날 저녁부터 너는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지. 저녁때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을 다음날 학교에 가져가서 책상 안에 놓고 수업시간에 몰래몰래 읽기도 했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집에 꽂혀있는 10권 중에서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했지.
"벌거벗은 임금님"을 읽으며 소리 내어 웃고, "어린이와 거인"을 읽으면서 거인을 무서워하고, "금도끼와 은도끼"를 읽으며 네가 금도끼를 간절히 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책에 그려진 여러 삽화들도 무척 좋아했지.
그런데 네가 국민학교(초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는 점차 나를 보는 시간이 줄기 시작했어. 예전에는 거의 매일 나를 봤었는데 말이지. 그러더니 졸업할 무렵에는 어쩌다 한 번씩 들쳐보는 게 고작이었지. 네가 중학교 교복을 입고 나서는 말도 없이 나와 이별을 했지.
네가 하도 많이 읽어서 내 일부분은 너덜너덜 해지기도 했어. 하지만 너의 어린 시절과 함께 해서 행복했다는 걸 알아주기 바래.
여러분의 어릴 적 추억이 어린 물건이 뭐가 있는지 찬찬히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