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에서의 어느 게으른 하루

by 박유신 Scott Park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예전에 꽤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던 광고 카피이다.


일상적인 나의 하루는 아침에 휴대폰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를 끄면서 시작한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회사로 향한다. 회사에 도착하면 보통 읽지 않은 이메일 몇 십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루 일정표에 여러 개의 회의가 잡혀있다. 어떤 때는 서너 개의 회의가 쉬는 시간 없이 연속으로 빡빡하게 있다. 오늘 해야 할 일 리스트는 꽉 차있다. 회의에 늦으면 안 되므로 시간의 압박을 느낀다. 종종 예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여 시간을 잡아먹는다. 휴대폰에서는 전화, 문자, 카톡이 울려댄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바쁜 회사 업무로부터 벗어나, 전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게으른 하루를 보내기에 크루즈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는 것 같다. 이번 크루즈 여행은 호주 시드니에서 출발해서 뉴질랜드를 돌아보는 총 열흘 일정이다. 호주 시드니에서 출발해서 뉴질랜드에 도착할 때까지 꼬박 이틀을 바다 위에서 보냈다. 돌아오는 길은 싸이클론의 영향으로 안전문제 때문에 마지막 기착지인 픽턴 (뉴질랜드 남섬의 최북단에 위치한 조그만 항구 도시) 일정이 취소되는 바람에 만 삼일을 바다에서 보냈다. 이 기간이 게으르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다.


알람은 절대 맞춰놓지 않는다. 아침에 자연스레 눈이 떠질 때까지 잔다. 캐빈 안의 가상 발코니 스크린 사이로 파란 바다가 보인다. 느그적 느그적 기지개를 켠다. 아직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운다. 책 한 권을 고른다. 내가 머물고 있는 12층에서 카페가 잇는 5층까지 걸어 내려간다. 연어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한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푹신한 의자를 찾아간다. 가벼운 아침식사와 함께 책을 읽는다. 책을 읽다 지겨워지면 카페 옆에 있는 미니 도서관에 들러 매일 아침 새로 나오는 수도쿠 문제지 하나와 몽당연필을 가져온다. 머리에 쥐가 나면 수도쿠를 그만둔다. 바다를 바라보며 멍을 때린다.


'이제 뭘 할까?'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운동화를 신는다. 갑판에 있는 조깅 트랙을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한 바퀴가 560 m라는 표시가 보인다. 배 앞으로 가면 바람이 거세다. 큰 배라서 흔들림이 없어 뛰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밤에 비가 왔나 보다. 트랙 군데군데가 젖어 있다. 미끄러져서 머리가 깨지면 큰일이다. 조심조심 물이 있는 곳을 피해 뛴다. 그러다 잘못해서 물이 고인 곳을 밟았다. 앗, 신기하다. 전혀 미끄러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물이 있는 곳을 밟아본다. 미끄러짐 없이 오히려 트랙이 내 운동화를 잡아준다는 느낌이 든다. 트랙에 첨단 소재를 이용한 것같다. 맘껏 속도를 내서 달린다. 머리를 비우고 두 발과 호흡에만 온전히 집중한다. 가끔은 걸어가는 아가씨의 뒷모습에 시선을 빼앗긴다.


점심식사를 위해 부페로 향한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다양한 국적의 승객을 고려해서인지 음식은 아시아 요리와 웨스턴 요리가 골고루 제공된다. 부페음식이 지겨울 수 있으니까 매일매일 다른 스페셜 요리가 선보인다. 태국요리, 몽골 요리 등등. 맘이 동하면 맥주 한 병을 시킨다. 호주 맥주는 물론 아사히, 코로나, 버드와이저 등 다양한 맥주가 마련되어있다.


점심 먹은 것 소화도 시킬 겸 친구 가족과 함께 빅투라는 카드 게임을 한다. 훌라 게임과 비슷한데, 숫자 2 카드가 우선순위가 제일 높아서 빅투라고 불린다. 손에 든 패를 제일 먼저 내려놓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웃음꽃을 피우며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카드 게임이 지겨워지면 낮잠을 자러 방에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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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정해놓은 레스토랑에 저녁을 먹으러 간다. 크루즈 동안 내내 우리를 전담하는 웨이터가 웃으며 환하게 맞아준다. 식사는 애피타이저, 메인 요리에 이어 디저트가 나온다. 이게 다 공짜다. 사실 크루즈 비용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말이다. 메인 요리를 먹고 나서 좀 섭섭한 느낌이 들면, 메인 요리 하나를 더 시켜도 된다. 물론 추가 비용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먹다가는 크루즈 여행이 끝난 후에 바지가 안 맞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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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좀 쉬다가 쇼를 보러 간다. 쇼라고 해서 크루즈 배의 승무원들이 노래와 안무를 연습해서 공연하는 줄로 짐작하였더니 크게 잘못된 생각이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할 정도의 기량을 갖춘 프로페셔널들이 공연을 한다. 어느 날은 전자 바이올린 연주회가 열린다. 30년 경력 가수의 콘서트, 프로덕션 뮤지컬, 코미디언 쇼 등 매일 다른 공연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쇼가 끝나면 바로 옆에 있는 바에 들른다. 맘이 내키는 칵테일, 와인 또는 맥주 한 잔을 걸치며 공연에 대해 이야기 꽃을 피운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아닌 "먹고 쉬고 즐겨라"이다. 휴대폰은 크루즈 배에 들어오면서 전원을 끈다. 어차피 바다 위에서는 전화도 안되고 인터넷도 안된다. 알람도 없다. 미팅도 없다. 해야만 하는 일 리스트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린다. 게으르게 하루를 보낸다.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충분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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