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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신 Scott Park May 11. 2018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고미숙 님이 지은 동의보감 책을 읽고 나서

이 책의 제목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을 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의보감이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우주와 삶의 비전과는 무슨 관계가 있나? 제목이 너무 거창하네. 혹시 마케팅을 위한 낚시성 제목인가?' 하지만 460쪽이 넘는 만만치 않은 분량의 책을 읽으며, 이 책이 제목에 걸맞다고 느꼈다. 단지 몸과 건강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우주에 대한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아하"라고 외치며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던 부분들을 모아서 아래에 소개한다.  


병의 새로운 정의

웬만큼 살만하면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얼마나 게으른가를 정직하게 볼 기회를 놓쳐버린다. 그래서 아파야 한다. 아파야 비로소 보게 된다.

태어나서 처음 앓는 것도 열병이고 노인들이 죽을 때 최후에 앓는 병도 대개는 폐렴이다. 감기로 시작해서 감기로 끝나는 인생! 그렇다면 거꾸로 감기야말로 살아있음의 증거가 아닐까. 그렇다면 "감기 때문에 못살겠어요"가 아니라, "감기에 걸릴 수 있어서 행복해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게 있어 감기는 운명이다. 
한 지인이 중년에 중풍을 맞아 반신불수가 되었다. 사업이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자 이 분이 매일같이 남대문에서 남산까지를 걸었다고 한다. 그 속도가 오죽했을까. 남산 타워까지 다녀오면 하루해가 다 갔다. 그렇게 1년 동안 정말 무심하게 걷기만 했는데,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몸이 거의 완치되었을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큰 병일수록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는 메시지에 해당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만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삶은 계속된다. 건강이란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병을 선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다. 


아픔(병)은 축복이고 은총이다. 내가 암을 겪었기에 다른 암환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삶의 의미를 살펴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주어진 큰 행운 중의 하나이다. 


똥오줌에서 배우는 깨달음

건강의 지표는 식스팩이나 롱다리가 아니다. 가장 먼저 소화가 잘 되고 있는가? 그리고 똥오줌이 잘 나오고 있는가? 다시 말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타자들을 잘 수용할 능력이 있는가? 그리고 이미 익숙해진 것들과의 작별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는가? 핵심은 거기에 있다. 어디 생리현상만 그러하랴. 인생살이 또한 마주침과 결별의 끊임없는 연속이 아니던가. 낯선 존재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시에 익숙해졌을 때 기꺼이 결별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곧 깨달음이라고 했다. 이것이 똥오줌을 비롯한 내 안의 타자들이 전해주는 메시지이다. 

망상이란?

망상이란 한마디로 시간과 공간이 따로 노는 것을 뜻한다. 겨울엔 봄을 기다리고 봄엔 가을을 꿈꾸고, 여기에선 저곳을, 저기에선 또 다른 곳을...... 이런 엇박들 속에서 '지금, 여기'의 시공간성은 해체되어 버린다. 남는 것은 오직 부질없는 망상들의 쳇바퀴뿐. 이 차이 없는 반복 속에선 아무것도 생성되지 못한다. 인생도, 우주도. 그러므로 그 부질없는 쳇바퀴를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지금, 여기'라는 현장을 오롯이 주시할 일이다. "겨울에 여름을 그리워하지 않고 밤에 새벽을 기다리지 않는" 툰드라의 유목민들이 그러하듯


너 자신이 부처다

수명이 상대적으로 짧은 우리는 모두 윤회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 몸속에 있던 원자들은 모두 흩어져서 다른 곳에서 새로운 목적으로 사용된다. 나뭇잎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몸이 될 수도 있으며, 이슬 방울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원자들은 실질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중에서)
호오, 내 안에 부처도 있고 칭기스칸도 있다니, 왠지 나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대견해 보인다. 너 자신이 부처다라는 말도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거다.


인생이란?

서울대공원에 있는 코끼리 거북이는 102살이다. 에콰도르에서 수놈 두 마리가 함께 왔다. 한 놈이 죽었다. 그러자 남은 놈은 식음을 전폐하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심 끝에 대공원 측은 두 살짜리 붉은 코코아티 너구리들을 투입했다. 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종족이다. 아니나 다를까. 너구리들은 겁도 없이 거북이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다닐 뿐 아니라, 심지어 등에 올라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온갖 난리부르스를 다 떨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북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너구리들과 헤엄을 치고 친구가 된 것이다. 다시 살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이 기사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인생이란 바로 이렇게 나 외의 다른 존재들과 접속하는 것이다.

티베트 어머니로부터 배우는 자녀 양육법

"티베트 의학의 지혜"라는 책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티베트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대로 바구니 안에 넣어 둔다. 그리고 아기가 울기 전까지는 그대로 아무것도 주지 않고 방치해 둔다. 그러다 아기가 울기 시작하면 그때야 비로소 살아 있다고 간주되어 "살아갈 마음이 있구나"하고 탄생을 인정해 준다. 그다음 수유는 완전히 엄마 마음대로다. 아기가 아무리 울어도 젖이 불어 어쩔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아기도 울다 지쳐서 무아지경에서 전부 빨아먹게 된다. 이 수유 시스템은 아주 이상적이어서 티베트의 어머니들은 잔유때문에 생기는 유선염 등에는 걸리지 않는다. 울게 내버려 두는 것은 폐를 발달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티베트는 공기가 희박하기 때문에 폐가 약하면 살 수 없는 곳이다. 일부러 울게 함으로써 폐를 발달시켜 호흡기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책임지도록 해주는 것이다. 미리 앞서서 부모가 챙겨주고 얼러 주는 법이 없다. 


칭찬은 고래도 멍들게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는데, 혹시 그 고래의 후일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고래는 과연 행복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장단에 맞춰 계속 춤을 추다 보면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테니까. 그래서 저 경구는 그 사이에 이렇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칭찬은 고래도 멍!들게 한다!"


배움과 글쓰기

배움은 곧 타자와의 능동적 접속이자 삶의 현장에 적극 개입하는 실천적 행위이다. 그 행위들이 교양과 정보의 지리한 나열에 그치지 않으려면 글쓰기를 통해 지성의 수위를 높여 가야 한다.
의역학이라는 저 원대한 지평선 위를 질주하려면 구체적인 윤리적 실천이 수반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행을 닦아야 한다. 행으로 이어지지 않는 건 꿈이 아니라 망상일 뿐이다. 그럼 어떤 행이 필요할까? 108배나 등산, 걷기, 낭송 등등 방법은 수없이 많다. 뭘 택하건 매일의 일상에서 규칙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가능하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공간에서, 처음에는 힘들지만 몸이 그 리듬에 익숙해지면 그 시공간의 기운을 몸에 저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 반드시 앎의 의지와 욕망이 함께 가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어떤 실천이나 수행도 매너리즘에 빠지고 만다. 글쓰기가 가장 좋은 수련법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병 치료에 있어 의사의 역할

융은 의사로서 말하는 대신 환자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그러고 나면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병의 문제부터 치유 단서까지 찾아내는 것이었다. 병의 심판자로서, 치유의 구원자로서 의사라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유은 알았다. 의사와 환자는 병이 던져준 수수께끼를 함께 푸는 놀이의 참가자였다. 거기서 길을 만드는 것은 환자의 몫이고 의사는 조력자일 뿐이다.
편작에서 융까지, 치유 본능에 충실한 의사들의 전언은 한결같다. "병을 만든 것도, 그 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도, 그리고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의사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이 기나긴 여정을 이끌어 준 우리들의 멘토인 허준의 전언이기도 하다. 


건강을 위해 일상에서 실천할 것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음양탕을 마신다. 음양탕은 끓인 물 반 그릇과 새로 길러온 물 반 그릇을 합한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섞으면 뜨거운 물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찬물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이렇게 수승화강이 일어나면 물분자가 활성화되어 약물이 되는 것이다.

눈의 건강을 위해서 열이 나게 손바닥을 비빈 후 두 눈을 14번 문지른다. 

음식을 먹은 후에 100보가량 거닐고 나서 자주 손으로 배를 문지른다.

저녁에 포식하지 않는다.

잠잘 때 배는 따뜻하게, 머리는 차갑게.


병은 죽음으로 가는 저주가 아니라 인생을 의미 있게 살 수 있게 만드는 축복이다. 병에 걸렸을 때 의사는 단지 조력자이고 나 자신이 진정한 치료자이다. 똥오줌을 통해 타자들을 받아들이고 때가 되면 이별하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현재의 자연 및 다른 사람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또한 과거의 인물들과도 원자를 공유하고 있다. 배움이 단지 교실에 앉아 책을 보고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책, 나의 성찰, 남과의 교류, 글쓰기를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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