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유신 Scott Park Jun 19. 2018

20 km 달리기 훈련에서 배운 삶의 지혜

마라톤 훈련의 일환으로 빠르지 않은 속도로 약 20 km 정도를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뛰어야 한다. 지난 일요일 오후 2시 반 정도에 시작해서 약 2시간 동안 약 20 km 거리를 뛰었다. 이때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정리해본다. 


배려 


집들 앞에 나 있는 인도를 따라 달리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어떤 할머니가 걷기 불편해 보이는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걸어왔다. 인도가 좁기 때문에 두 명이 서로 반대편으로 지나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약간 비켜줘야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달리고 있던 속도를 유지했다. 맞은 편의 할머니는 나를 위해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길을 비켜주었다. 감사하다고 얘기하면서 그들을 지나쳤다. 순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배려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였다. 나는두 다리로 멀쩡히 잘 달리고 있지만 할아버지는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셨다. 


잠시 후 개를 산책시키며 걷고 있는 여학생이 눈에 띄었다. 나는 시멘트 인도 옆의 잔디밭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그 여학생이 미소를 보냈다. 이어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걷고 있는 아줌마가 보였다. 아이에게 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비켜주었다. 


오만과 독선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일과 후에 회사에서 집까지 뛰어온다. 중간에 공원이 있다. 공원 둘레로는 약 400 미터 정도의 트랙이 있다. 이 트랙은 걷기,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를 위해 이용된다. 나는 이 트랙을 이용해서 인터벌 트레이닝을 했다. 트랙 두 바퀴를 전속력으로 뛰고 난 후에, 반 바퀴를 천천히 달리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트랙을 뛰면서, 반대 방향에서 걷거나 뛰는 사람들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따로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무식한 사람들이네. 기본 에티켓도 모르나. 반대 방향으로 뛰면 어떡해? 잘못하면 부딪혀서 다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지난 일요일에 깨달았다. 그동안 반대방향으로 뛴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것을. 공원의 반대편 입구를 이용하다 보니, 내가 무의식적으로 반대방향으로 뛰었던 것이었다. 


내가 철석같이 아무런 의심 없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       


동정심과 우월감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집 앞에 배달된 잡지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쪽 다리는 괜찮지만 다른 한쪽 다리는 뻐청다리로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는 얼마나 안되었나? 나는 두 발로 멀쩡히 이렇게 뛰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그러나 바로 이어서 나의 값싼 동정심과 우월감을 지켜보게 되었다. 내가 두 발로 달리기를 즐길 수 있음은 분명 감사한 일이지만, 그와 나를 비교함으로써 그를 동정하고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후진 일이라고.  


공포 


호주에서는 심심치 않게 신문이나 소셜 미디어를 통해 가정집에 뱀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접한다. 내가 전에 살던 집에서 불과 10 미터 떨어진 교회에서도 실제로 뱀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지난 일요일 열심히 내리막 길을 달리고 있는 데, 발 앞쪽으로 뱀 모양의 형체가 나타났다. 인도라서 뱀이 나올 확률은 드물지만, 나무가 많은 지역이기에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겁을 집어먹었다. 순간적으로 공포감이 몰려왔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라 시멘트 블록 사이의 검은 고무 밴드가 튀어나와 있었다. 


실제로는 아니지만 나의 감각과 생각으로 인해 공포를 느꼈던 것이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렇게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이 적지 않으리라. 눈 크게 뜨고 당당히 맞서 보자. 만약 진짜 뱀이면 열심히 도망가자.  

   



달리는 즐거움을 느낄  있는 20 km 훈련이었다. 할머니의 배려, 나의 독선, 신체적 결함에 대한 동정 그리고 뱀에 대한 공포를 생각한 시간이었다. 삶의 지혜랄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다음 달리기 연습에 이런 지혜가 더 이상 안 나와서 글을 쓸 거리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든다. 하지만 괜찮다. 느끼는 게 많으면 많은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뛰면 또한 그대로, 달리기를 온전히 즐기면 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발끈을 매다. 10년 만의 풀코스 마라톤 완주를 위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