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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팔청춘 Dec 04. 2021

어쩌면 이런 순간이 내게도

책, 일의 기쁨과 슬픔


사실 책을 잘못 선택했다. 단편인 줄 알았으면 고르지 않았을 거다. 한창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고, 그것이 소설로 쓰였을 때 어떤 모습으로 읽힐지 궁금해서 산거였다. 당연히, 장편을 기대했고, 목차에 있는 제목이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는 건 줄 알았다. 그 항목 하나하나가 단편이었을 줄이야. 책 제목이 주는 호기심으로 산 내 실수다.


책은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잘 살겠습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 <다소 낮음> / <도움의 손길> / <백 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 / <새벽의 방문자들> / <탐페레 공항>


이 중 재밌게 읽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일의 기쁨과 슬픔>, <잘 살겠습니다>, <탐페레 공항>, <도움의 손길>, <새벽의 방문자들>, <다소 낮음>, <백 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이다. 전반 네 개는 흥미로웠고, 후반 네 개는 사실 그저 그랬다.


첫 번째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주인공이 좋아하는 전 직장 동료를 만나러 후쿠오카에 가서 겪는 내용이다. 연애 경험이 많은 주인공은 여자를 꼬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같이 밥을 먹고, 노천탕에서 목욕을 하고, 같이 후쿠오카를 거닌다. 그러면서 남자는 절정의 타이밍을 찾는다. 고백하고, 하룻밤의 즐거운 섹스를 할 타이밍을. 그토록 바라던 여자와의 섹스는 하지 못한다. 오히려 너의 의도를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자가 말한다. "나랑 섹스하고 싶었죠?"라고. 들켰다는 마음에 그제야 모든 걸 내려놓고 애달 복걸 하는 남자. 하지만, 이미 타이밍은 지나간 지 오래였고, 애초에 그런 타이밍을 만들어 줄 마음이 여자에겐 없었다. 당신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냐는 남자의 말에 "음, 반반?"이라고 말하는 여자. 그녀는 분명히 남자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남자로서, 여자로서 저 사람 참 괜찮다.'라고 느끼는 순간들이 올 수도 있다. 내가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를 상상해보며 재밌게 읽었다.


두 번째는 소설의 제목이 되는 <일의 기쁨과 슬픔>이다. 우동마켓이라는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일하는 여자가, 플랫폼에서 중고거래를 무진장 많이 하는 빌런이 누군지 확인하고, 앱 화면에 도배되지 않도록 한다는 특명을 받아 벌어지는 일을 담았다. 소설 속 우동마켓은 현실에선 당근 마켓일 것이다. 당근 마켓 직원은 아니지만, 실제로 앱 사용자 중 빌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진짜로 저렇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실제 판교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현실 당근 마켓에서도 이런 고민을 할까?를 생각하며 재밌게 읽었다. 거기다 빌런이 빌런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고, 현실에서 저렇게 하면 바로 신고해야 되는거 아니야? 나 같으면 바로 신고했다며 감정 이입을 하며 읽었다.


세 번째 <잘 살겠습니다>는 직장 동기 언니와 결혼을 앞둔 주인공의 이야기다. 눈치가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정말 순수한 건지 모를 회사 동기 언니. 청첩장을 줄 마음도 없었는데, 어느 날 본인은 왜 청첩장을 주지 않냐며 연락이 온다. 3년 만에 온 연락. 그것도 결혼 1주일 전에. 만나기 싫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간 주인공.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3년 전과 똑같이 눈치 없는 동기 언니와 그녀도 곧 결혼한다는 소식이었다. 주인공이 한창 열심히 모은 결혼 준비 정보를 쏙 먹고, 정작 결혼식은 오지 않은 동기 언니. 그 충격에 그러면 안 되는 것이라 톡톡히 알려주려고 하지만, 너무나도 순수한 언니에겐 주인공의 철저한 가르침도 한낱 프로필 사진이 될 뿐이었다.


네 번째 <탐페레 공항>은 PD 취준에 뛰어들기 전 스펙을 쌓기 위해 아일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가던 주인공의 이야기다. 환승 나라인 핀란드 탐페레 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눈이 어두운 노인과 만난 이야기. 자신을 도와달라는 노인의 말에 엉거주춤 그를 돕게 되고, 답례로 사진 한 장을 찍힌다. 세계대전에 참전한 참전 용사인 그는 소싯적에 사진가로 활약하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3개월의 짧은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귀국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몇 달 전에 만난 핀란드 노인이 보낸 사진이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아, 부랴부랴 뜯어본 편지지에는 이렇게 잘 찍을 수 있나 싶은 자신이 담긴 사진이 있었다. 꼭 답장을 해야지 하던 주인공. 하지만 현실은 취업준비에 치여 점점 노인을 잊어갔고, 3년이 지나서도 답장을 하지 못했다. 3년 전 만났을 당시 이미 아흔이 넘은 나이였던 노인, 그 노인은 아직도 살아있을까? 내 답장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수화기를 든다. 뚜루룽, 덜컥. 드디어 받은 전화 너머엔 그가 아닌 그의 아내가 서 있었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히 이즈 리빙" 그는 떠났다는 걸까? 살아 있다는 걸까?. 취준생이 되면 한 번쯤 받아보는 자기소개서 질문에 주인공이 받은 질문이 있다면 나는 뭐라고 답할까?를 생각하며 재밌게 읽었다.


일을 하게 되면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업무 자체도 경험하지만, 회사라는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만남게 감정이 생기고, 그 감정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공존한다. 대게 그런 감정엔 기쁨보단 슬픔이 많다. 장류진 작가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일을 하며 생길 수 있는 만남에 대한 책 같다. 그리고 거기서 겪는 감정을 조금 웃기게 표현한 듯하다. 책을 읽으면서 한번쯤은 이런 일이 내게도 생기지 않을까, 나도 일을 하면서 이런 감정을 품게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했다.


내게도 한번쯤 저런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싶다. 나도 앞으로 내 일에 대한 글을 쓴다면, 이렇게 단편 단편으로 적어보면 어떨까 싶다. 일을 하며 더 많은 만남과 감정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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