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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rbblr May 18. 2024

커피

핀란드에 있었을 때 깜짝 놀랐던 것 중 하나는 핀란드 사람들의 커피 사랑이었다. 커피는 거의 생존의 필수처럼 보였다. 사실 나에게도 그랬다. 해가 짧아 온몸에 기운이 쭉쭉 빠지는 겨울에는 카페인 없이는 몸에 생기를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커피는 에너지를 끌어올려 주는 필수 보존제였다. 한국에서 경험하는 커피도 비슷하다. ‘커피 없으면 힘들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핀란드와 한국에서의 커피는 카페인 그 자체다.


발리에서는 커피를 다르게 경험했다. 이상하게 커피가 안 당겼다. 커피를 마셨을 때의 두근거림이 부담스러웠고, 안 먹었을 때의 편안함이 더 좋았다. 한국에서 달고 살았던 커피가 그렇게 한 번에 끊기다니 놀라웠다. 일상에서 커피가 필요한 존재가 아니게 되니 삶이 더 편리해진 기분이었다. 당장 커피숍을 못 찾아도 큰일이 아니었다. 필요한 것이 없어진 삶은 자유롭다. 왠지 모르지만, 발리에선 커피를 잊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커피는 또 다르다. 오, 그곳에서는 정말 커피를 즐겼다. 커피를 마시는 순간이 행복했다. 아침에 자주 가던 구멍가게 같이 작은 카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본 죠르노!” 라며 활기차게 맞이해주는 사장님이 있었다. 와글와글 여러 모습의 사람들에 섞여 2유로 동전을 내고 설탕 한 봉지 촤르르 넣어 후룩 먹는, 손때가 묻은 작은 잔의 에스프레소는 하루를 시작하는 보물 같은 의식이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커피는 여유와 즐거움이었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만난 커피와의 관계가 마음에 든다. 커피는 나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도 아니었고, 없어야 하는 존재도 아니었다. 즐기면 그만이었다. 향과 맛, 커피를 마시는 시공간 전체를 한꺼번에 즐기는 경험 그 자체. 그런 관계에서 진정한 즐거움과 자유가 흐른다. 그럴 때 나와 그 존재 사이에 무언가 추가로 더해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 생긴다.


당신에게 내 생존 여부의 책임을 물으며 집착하지도, 냉정하게 외면하지도 않겠어요. 당신을 즐기면서 넓고 여유롭게 경험하겠어요. 당신과의 더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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