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가치의 우위에 대하여
21세기 영화 역사에서 MCU가 차지하는 위치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세대 마블 히어로가 총출동하고, 일부는 은퇴하기도 한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로 마블의 위상이 이전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이 시리즈가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여전히 막강하다. 한편으로는 단순히 슈퍼히어로 영화 시리즈였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부분은 과소평가된 것도 같다. 성공적이든 아니든 백인 남성 히어로 위주였던 세계에 소수자 히어로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도 제작했고, 그 결과 흑인들은 블랙 팬서에 열광했고 나와 같은 여성들은 캡틴 마블을 보면서 오열했으니까. 지나친 PC주의니뭐니 논란이 많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도 <캡틴 마블>을 보면서 캐럴이 일어나던 순간에 극장에 있던 여성들이 함께 느꼈던 전율을 잊지 못한다. 극장에는 여성 관객이 정말 많았고, 넘어졌던 캐럴이 일어나던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숨죽여 관람하다가 끝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같은 소수자 안에 속하는 이들끼리 말없는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그런 일을 MCU는 해낸 거였다.
한편으로는 장대한 시리즈의 한 시기를 마무리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헐리웃을 위시한 서양권이 가장 우위에 두는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다양한 히어로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히어로에게 동등한 러닝타임을 할애하진 않는다. 이는 서양권에서 공정성이나 평등보다는 다양성이 더 높은 가치를 갖는다고 과대해석할 수도 있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 숭상되는 가장 큰 가치는 특히 최근들어 공정성이 아닐까 한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국인에게 절대 건드려서는 안될 두가지가 대학 입시와 군대라고 하는데 둘 모두 공정성과 관련이 있다. 대학에 입학할 때는 공정한 절차를 거쳐 능력대로 대학에 입학해야 하고, 입대할 때는 그 누구도 편법을 사용해 고의적으로 병역의 의무를 피해서는 안된다. 후자에 관해서는 나는 면제받는 국민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자에 대해 좀 더 할 말이 많다. 대학 입시의 공정성 자체에 대해서는 학창시절 내내 여러가지 생각이 있었고 특히 유력 정치인 자녀의 입시 비리가 속속들이 밝혀지는 근래 사태까지 더하면 그토록 한국인들이 부르짖던 공정이라는 가치는 대체 무엇이 되었나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유학을 계기로 공정이라는 가치가 정말 최우선의 가치일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유학을 와서 첫 학기에 들었던 연구 방법론 수업에는 낮은 비율이긴 하지만 온라인 시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험 방식은 대단히 의뭉스러웠는데 시험이 오픈되는 날 아무 시간에나 접속해서 접속한 시점으로부터 한시간 동안 자유롭게 문제를 푸는 것이었다. 오픈북으로 풀든 챗GPT를 활용하든 달달 외워서 시험을 보든 감시하는 사람이나 시스템은 전무했다. 당시만 해도 나에게 친하게 지내는 동기라곤 올리비아뿐이었기 때문에 혼자 공부해서 파일을 뒤져가며 시험을 볼 생각이었다. 반면 친구가 많았던 올리비아는 이미 친구들과 조를 짜서 같이 시험을 보기로 한 상황이었다. 시험 당일에 보니 이미 방을 잡고 같이 문제를 푸는 동기들이 수두룩했다. 다행히도 나는 올리비아의 도움으로 조에 합류해서 함께 시험을 볼 수 있었고 범블비, 댄서와 친해지는 계기가 됐다. 반지와는 추후에 다같이 점심을 먹으며 친해졌다. 한국인답게 이래도 되나 싶기도 했지만 내가 혼자 풀었다면 절대 받았을 수 없는 높은 점수를 받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시험 방식이다. 시험에 편법의 여지가 얼마나 많은가. 한국 대학이었다면 이미 편법을 쓴 학생들이 고발당해서 교수가 머리를 싸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론 생각해보니 이 시험은 학생 그 누구에게도 딱히 중요한 시험이 아니었다. 학교 입장에서는 학생들이 무사히 졸업해서 멀쩡하게 취업을 하는 게 비율이 얼마 되지도 않는 시험의 공정성을 따지는 것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니 애들이 모여서 시험을 치든 검색을 해서 시험을 치든 일단 합격점을 줘서 졸업을 시키는 게 우선이다. 특히나 외국인 학생들이 지불하는 거금을 생각하면 이들에게 학점 미이수에 따른 졸업 불가라는, 낸 돈에 합당하지 않은 서비스를 대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와는 별개로 사실상 조별과제나 다름없는 시험을 치면서 동기들은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됐다. 팀 프로젝트만으로는 형성되지 않는 네트워크가 온라인 시험을 통해 한꺼풀 더 생긴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네트워크는 졸업생들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서로를 돕는 끈끈한 인맥으로 작용할 것이고, 그렇게 서로 도우며 사회적인 성공을 도모하는 게 대학 입장에서도 훨씬 유리할 게 분명하다.
한국인 정서상 아마도 입학 기여제는 한세기 안에 도입되기 힘들 것이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인데, 어쩌면 입학 기여제에 대해서도 한국인 모두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학벌이 갖는 가치를 고려해볼 때 졸업생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거금을 내면 정원 외로 명문대에 입학할 기회를 준다는 건 분명 공정성을 해치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다. 지금도 대학 내에서 지역균형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에게 지균충같은 저급한 별명을 붙인다는데 기여 입학제로 입학한 부잣집 출신 학생들에게도 유사한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지긴 한다.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학교 입장에서는 어차피 정원 외 선발이기 때문에 입학 자격을 가진 지원자의 자리를 빼앗는 것도 아닌데다 부수입이 생겨 재학생들의 교육환경 개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거기다 거금을 낼 정도라면 사회에서 한자리 하고 있는 유력자들의 자녀일텐데 그렇다면 이들이 졸업생들과 형성할 네트워크까지 고려할 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옵션이 된다. 나도 힘든 입시를 통해 대학에 입학했고, 누군가는 단순히 나와 같은 대학을 나온 부모를 만났기에 나의 동문이 된다면 허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허탈감만 무시할 수 있다면 내가 졸업 후 사회에 진출했을 때 그 동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잠재적 도움은 어느 정도일까. 단순하게 누군가는 피땀흘려 일궈낸 성취를 누군가는 거금을 지불하고 손쉽게 얻어내는 게 과연 공정한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유학생활을 하면서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해서 재벌가 자녀와 명문대 출신들이 결합했을 때 결국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기여 입학제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서열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사회의 특성상 명문대 졸업장이라는 건 거금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소위 말하는 있는 집 자녀에게 사회를 살아갈 무기 하나를 더 얹어주는 건 계층간 불평등을 심화시킬 게 뻔하다. 공정성 자체에 관한 논의는 접어두고, 과연 공정이라는 가치가 모든 가치에 우선해야 하는 가치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노스를 상대하기 위해 수많은 히어로들이 모여들었고, 비록 이들이 동등한 분량을 할애받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양성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가지각색의 히어로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언맨과 블랙 위도우의 은퇴길이 너무 차이가 났다는 건 분노할 일이지만..
한국 사회에 살면서도 책을 많이 읽고 세상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방법으로 내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영국으로 유학 생활을 와서 느낀 건 겪어봐야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온 세상과 다른 가치를 기반으로 다져진 사회를 경험하는 건 간접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깨달음을 선사한다. 다른 가치를 포용한다는 건 이런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닐까. 나는 인공지능과 데이터 사이언스를 배우려고 유학길에 올랐는데, 정작 이 분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는 것만 깨닫고 사회적인 현안에 대한 시각을 더 기른 것 같기도 하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미지 출처는 네이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