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걷다 우연히 매화나무 한 그루를 봤다. 시멘트로 둘러싸인 무채색 공간에서 하얀 매화만이 그 무채색에 생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봄이라는 게 실감 났다. 겨울 내 땅 속에서 웅크리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면 고개를 삐죽 내미는, 새싹들이 하나둘씩 보이는 그런 봄.
문득 내 인생에도 봄날이 왔으면 싶었다. 그러나 흔한 자기 계발서의 내용처럼, 언제가 될지 모르는 어느 미래에 오늘을 돌이켜보면, 지금 내 삶이 봄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의 삶을 돌이켜봤다. 생기가 있었나? 피곤에 찌든 눈. 녹초가 되어버린 몸. 무언갈 더 해야 할 것만 같은, 스스로에게 주는 압박감. 그럼에도 하지 않는 게으름. 운동을 할 때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거친 심장박동. 무대가 끝나고 조명 빛 아래에서 박수갈채를 받으며 오래간만에 느꼈던 부끄러움이 아닌 자부심. 극장에 앉아 올해 본 영화 중 최고라고 연신(마음속으로) 외쳐대던 감동. 좋아하는 사람들과 알딸딸하게 취한 채 카카오택시가 아닌, 네이버지도에서 집을 찍고 내비게이션을 킨 채 택시를 기다리던 그 도로. 다가오는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는 설렘. 소화시킬 겸 야간등산을 하고, 하산 후에 맥도널드에서 먹은 햄버거 세트들.
나름 봄날이려나? 언제가 될지 모르는 어느 미래까지 갈 필요 없이 지금 돌이켜만 봐도 언젠가는 이 기억들을 추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원효의 해골물처럼, 삶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인가 싶다.
그냥 지금처럼, 때로는 내 감정에 휘둘리더라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긍정적으로, 좋은 일에도 미련 없이 살아야지. 내가 걸어온 길은 전부 봄날의 꽃길이라 생각해야지. 다만 꽃이 많았던 순간과 적었던 순간이 있었을 뿐.
머지않은 과거, 공연이나 각종 행사에서 꽃다발을 받으면 부담스러웠다. 집에 꽃을 꽂아두면 들려오는 ‘저런 쓸데없는 거 왜 들고 왔노’라는 아버지의 잔소리와 꽃이 썩어 땅에 묻어야 하는 순간을 지켜본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요즘은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라도 받으면 기분이 참 좋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생화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보드라운 마음을 알 것 같다. 얼른 꽃병에 꽂아두고 두고두고 보고 싶다. 아버지의 잔소리도 이젠 없다. 오히려 얼마 전엔 예쁜 꽃병을 하나 사자고 하셨다. 최근에 주변 환경이 좋아지면서 생각지 못 한 좋은 변화들이 생긴 것 같다. 요즘은 밤에 어머니 아버지와 같이 밥 한 끼 하는데, 그 소소한 시간이 행복하다.
탄생과 죽음은 필연적이다. 과학의 발전과 줄어든 전쟁으로 삶의 영위가 안정적이게 된 탓에 현대사회에서 ‘죽음’이 흔치는 않다. 내가 모르던 과거, ‘죽음’이 잦은 시절,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현대인들과는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불변의 공통점이 있다면, ’ 죽음‘은 필연적이라는 것. 그리고 ‘죽음’이 있어야 ‘탄생’이 있고, ‘탄생’이 있어야 ‘죽음’이 있는, 어느 것이 먼저일지 모르는 자연의 순환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흙에 묻힌 꽃을 보며, 이 흙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할 순간을 기대한다. 찬란했던 생기가 깃들어진 그 꽃은 새로운 생기가 된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나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기가 탄생함을 기대하며 죽고 싶다. 내 삶의 생기가 더 찬란해져 내 죽음이 더 찬란해지길. 그래서 새로운 생기의 탄생들이 더 찬란해지길. 그렇게 ‘우리‘의 존재가 자연의 생기 속에서 찬란해지길.
끝이 보이지 않는 시멘트 사이 하얀 매화 한 그루가 봄날을 알리 듯, 우리의 봄날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은 기적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