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메종일각’을 읽었다. 정말이지 인생 만화라고 생각들 정도로 재밌게 봤다. 한편으론 고다이(남자 주인공)의 우유부단한 모습 때문에 아주 답답하게 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읽다 보면 고다이의 고향이 ‘설국’이라는 설정이 나오는데, ‘설국’이라는 단어를 보니,메이플스토리에 예티가 나오는 맵이 생각났다. 그래서 가장 비슷한 곳이 홋카이도이려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니이가타현이더라. 그곳이 습도가 높아 강설량이 가장 많다고... 그렇게 ‘설국’이란 글자가 괜히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우연찮게 같은 이름의 책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길래 더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대로 읽던 책을 내려놓고, 도서관에 가서 ‘설국’ 빌리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설국을 읽을 때 제일 첫 문장에서 쉽사리 넘어가지 못한 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에서 국경이라는 말이 꼭 외국으로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국경이 군마현과 니이가타현의 경계선.. 이라고는 하는데, 왠지 허무했다. 국내면서 왜 ‘국(國)’이라 글자를 쓸까 싶은 샹각도 들면서... 한편으론 문화상대주의적 사고로 바라봐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지만 또, ‘국(國)’이란 거시적인 단어를 국내(미시적으로)를 대상으로 쓴다는 게 어색하긴 하다. 그럼에도 '설국', '국경'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참 멋있으면서도 고급져 보이긴 한다. 이렇게 써보니 두서없이 이도저도 아닌 우유부단한게 꼭 고다이같고, 꼭 시마무라 같은 ‘나’다. 여하튼 이런 생각에 빠져 관련 내용들도 찾아본다고 여러므로 시간을 썼다.
거창한 제목, 문장들과는 달리, 소설의 내용은 별게 없다. 가정이 있는 한량한 남자가 혼자 시골마을에 가서 두 명의 게이샤에서 이성적 끌림을 느끼지만, 정작 이들을 심적 충족의 대상(소모품? 아직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으로만 대하는 내용이다. 지금 나의 관점으로 보면, 한심하다. 그리고 이해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 나는, 중간중간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몇 번씩이고 뒤돌아가서 다시 읽곤 했다. 그리고 같은 맥락이긴 한데, 몇몇 문장들은 (번역의 문제인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맥락도 잘 안 잡히고, 문장 구조도 좀.. 아무튼 읽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갖고 있는 매력이 있다. 시각적 청각적 촉감적 묘사가 수려하다는 것. 책에 몰입될 때면 눈앞에 그 모습이 생생히 펼쳐진다.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다.
(기차 안. 화자가 앉은 창가 좌석 창문으로 건너편 좌석의 여자가 보이는 상황.)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 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 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미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커다란 감정의 흐름이 남았다. 이는 물론 처녀의 얼굴이 그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차창에 비치는 처녀의 윤곽 주위를 끊임없이 저녁 풍경이 움직이고 있어, 처녀의 얼굴도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말로 투명한지 어떤지는, 얼굴 뒤로 줄곧 흐르는 저녁 풍경이 얼굴 앞을 스쳐 지나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제대로 확인할 기회가 잡히지 않았다.
기차 안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었고 진짜 거울처럼 선명하지도 않았다. 반사가 없었다. 그래서 시마무라는 들여다보는 동안, 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잊어버리고 저녁 풍경의 흐름 속에 처녀가 떠 있는 듯 여기게 되었다.
바로 그때, 그녀의 얼굴에 등불이 켜졌다. 이 거울의 영상은 창밖의 등불을 끌 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등불도 영상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렇게 등불은 그녀의 얼굴을 흘러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빛으로 환히 밝혀 주는 것은 아니었다. 차갑고 먼 불빛이었다. 작은 눈동자 둘레를 확 하고 밝히면서 바로 처녀의 눈과 불빛이 겹쳐진 순간, 그녀의 눈은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이었다.
민음사, p.12-13
아니 미친 거 아인가. 창에 비친 여자의 얼굴에 반했다라는 말을 이렇게나 세심하고 아름답게 말할 수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아롬으로 감싸 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시마무라는 자신의 작은 그림자가 지상에서 거꾸로 은하수에 비춰지는 느낌이었다. 은하수에 가득한 별 하나하나가 또렷이 보일뿐 아니라, 군데군데 광운(光雲)의 은가루조차 알알이 눈에 띌 만큼 청명한 하늘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은하수의 깊이가 시선을 빨아들였다.
민음사, p.143
이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문장인데, 눈앞에 은하수가 펼쳐지는 느낌이지 않은가? 분명 글을 읽고 있는데, 4K 다큐로 은하수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사실상 내가 책을 읽을 때, 모든 문장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꾹꾹 눌러가며 읽진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특히나 모든 문장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읽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갖고 있는 진미를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마치 밥알을 꼭꼭 씹어먹으면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달고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몇 년이 지나고 이 책을 다시 읽고 싶다. 세월의 흐름을 겪으며 더 농익어진 미래의 스스로가, '설국'의 각 문장들이 지니고 있는 섬세하고 솔직한 맛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볼 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