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에 대한 오해(1)
낭만적일 것만 같던 영국의 2층 버스를 타고 가는 20분 내내 아이는 빽빽 울어댔고, 아이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가 이제는 열 살이 되었다. 더 이상 길거리에서 민폐가 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아이가 아기일 때는 음식점, 카페, 대중교통 그 어디든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는 1번이 민폐였다. 마치, 동양 엄마들은, 한국 엄마들은 아이들을 너무 애지중지 민감하게 케어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상당 부분은 남에게 폐가 되는 것을 못 견뎌하기 때문에 아이가 조금만 울거나 해도 얼르고 달래고, 아니면 처음부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먹이고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이고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아이를 키워본 엄마로서 알고 있다. 키워보기 전에는 유난하다, 자기 편하려고 아이를 쓸데없이 먹인다, 좋지도 않다는 영상에 아이를 노출시키며 자기 편하자고 그러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상당히 -사실은 전적으로- 사회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되려 아이를 키우게 되면서는, 공공장소에서 민폐각인데도 아이에게 지지 않고 대립하고 있는 엄마를 보면 그 용기와 뚝심에 "(나는 못하지만)화이팅"을 외쳤던 적도 있다.
런던의 빨간 버스에는 당당을 넘어 공격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엄마들이 유모차를 들이밀고 타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풍경이다. 유모차 한 대는 기본이고 두 대도 서로 자리를 맞춰가며 싣고 나면 버스운전기사는 여유롭게 기다렸다가 경쾌하게 내달린다. 모두가 해피했다. 아니 사실 꼭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 아직도 한창 놀아야 할 것 같은 나이에 히피족 같은 엄마들은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한 손으로 유모차를 몰고 다니기도 했는데, 버스에서 아이가 울어대도 황급하게 달래거나 안아주거나 하지 않았다. 정확하겐 그냥 내까려두었다. 그건 어떤 외향을 가진 엄마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승객들은 표정 하나 안변한 채 앉아있었고,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기는 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정말 저들은 아무렇지 않은가 한번씩 둘러보면 그들도 사람인지라 불편해 보이는 눈치였다. 버스 안의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울어대는 아이를 달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강심장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영국의 예의인가?
어쩌면 그 이해와 예의는 아이와 아이 엄마가 받고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란 생명체는 울기 마련이고 그 생명체가 할 마땅한 행동이다. 기시미 이치로의 "엄마를 위한 미움받을 용기"에서도 '아이들이 어른처럼 행동하기를 기대하지 마라, 아이들이 전철에서 흥미로 오고 가고 할 수 있다. 주변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그냥 두어도 좋다.'라고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사실 쾌감을 느끼며 동감하였지만 감히 실행할 수는 없었다.
영국 사람들은 서양의 육아스타일이 그렇듯 너무 즉각적으로 아이의 욕구를 받아주면 버릇없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합당치 않은 불평불만은 들어 넘겨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조금만 울어도 달래는 동양 엄마들을 보며 끌끌 혀를 찰 것이다. 그렇게 반복적으로 거절을 경험한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가 쉽게 들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학습하고 가급적 어른들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은 아이로 행동하도록 자라 가는 것이 그들의 육아인 듯 보였다. 그들이 꼭 옳다고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이들 수면 교육도 식탁 교육도 철저하게 어른의 삶을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은 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어른은 어른, 아이는 아이(나부랭이) 일뿐이다. 동양에서는 양육자와 아이가 기민하게 상호 작용을 하기에 동양인들이 정서적 발달도 지능적 발달도 일반적으로 좋은 게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그랬다. 영국에서 어린 두 아이들 다 키워낸 한국 엄마가 우는 아이를 태우고 유모차를 밀고 가면 동네 할머니가 "달래주면 안 돼"라며 엄지를 척 들어보였다고 했다.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는 것을 칭찬한 것이다. 우리 같으면 동네 할머니가 달려와서 "애를 왜 그냥 둬~"하면서 본인이 안아 달래줄 지경일 텐데 말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우리나라 버스에는 유모차가 탄 풍경을 볼 수 없다. 아마 아이가 2~3살쯤으로 돌아가서 외출을 한다고 상상하면, 자차를 끌고 가거나 대중교통을 타야 한다면 차라리 아기띠를 둘레 매고 어깨가 빠지는 것을 선택할 것 같다. 유모차를 싣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한국 풍경이다. 이제 우리나라 버스도 저상형이라서 보도와의 단차도 없고 유모차를 싣는 게 전혀 어렵지 않겠지만, 감히 버스 안으로 유모차를 트랙터 마냥 몰고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을 것 같다. 유모차를 위한 별도의 공간이 버스 안에 없는 것도 문제일 것 같긴 하지만, 유모차를 싣고 내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나를 위해 지체하며 기다리는 것을 참아낼 자신이 없다.
단순히 말하기엔 참 어려운 부분이다. 왜냐하면 버스 운영에 대한 시스템이 다른 것도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버스가 배차 간격보다 5분 넘게 늦는 것을 평범하게 각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가던 버스가 갑자기 여기가 종착으로 바뀌었다면서 "내리시라."며 버스 운전기사는 얼굴에 친절한 미소를 띠며 폭력에 가까운 공권력을 내휘두른다. 그런 만큼 버스는 충분히 늦을 권리마저 있어 보였다. 여유는 즉 미소일까? 버스운전기사들은 늘 친절했고 여유가 있고 행복해 보였다. 우리네 버스기사 아저씨들이 각박한 것은 그만큼 칼같이 시간을 지켜내야만 하는 시스템과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해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영국에서는 승객들도 덩달아 여유가 있었고, 급히 벨을 누르고 당장이라도 내릴 수 있는 태세로 준비했다가 쏜 총알처럼 내리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그러니, 유모차가 타면 웃으면서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도 비켜주었지. 한국에서 버스를 타니 다시 그 장전된 총탄이 된 긴장감에 쫀득해졌다.
이것이, 비단 버스 시스템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늦어도 되는 사회적 분위기와 용인되는 문화가 그 저변에 있다는 것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영국의 대중교통 특히 기차는 동네북같이 날씨만큼이나 공공적 Blame의 대상이다. "기차가 연착해서"라는 말 한 마디면 더 이상의 변명이 필요 없는 곳이 영국이었다. 설령, 가야 하던 회의에 못 가는 사정이 생기더라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대중교통 사정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 맘충에 대한 기사를 읽으며 마치 소위 선진국에서는 엄마들이 처신을 잘할 것처럼 글이 쓰여 있길래,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저 기억을 시작으로 자기 아이가 바닥에 토한 걸 치우지도 않고 떠나던 나의 매니저 리사 부부까지 영국 엄마들의 처신들이 파노라마같이 떠오르며 "풉"하고 웃었다. 엄마의 신분이라고 해서 엄마들을 두둔만 하는 것은 아니다. 청계천 변에 아이 기저귀를 속이 다 보이게 버리고 간 그 엄마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맘충이라는 것도 그 사회가 만드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영국 엄마들이 한국에 오면 예외 없이 다 맘충이 될지도 모른다.
한국이 이해의 폭이 좁다고 나무라는 것만도 아니다. 그저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에서는 다들 바쁘고 각박하다. 사람들은 언제나(?) 화가 나 있다. 그래서 꺼리만 있으면 불쑥 화가 나기도 하고 표출되기도 한다. 우리는 남을 이해하고 참아주고 용인하기에 고된 삶을 살고 있어 보인다. 스스로도 괜히 한의 민족이 아닌가보다 싶을 때가 많다. 당연히 지켜내야만 했던, 태어나 살아와 당연했던 세상의 프레임에서 살짝 벗어났다 들어오니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이더라는 것이다.
자꾸 "선진국은~" 하면서 환상을 갖지 말자. 그냥 우리와 그들의 삶의 조건이 다른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