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주택 기초 개념편
태어난 나라에서도 집은 구할 때마다 복병이 튀어나오고 부동산법이나 용어는 어렵기만 한데, 대체 가보지도 않은 나라에서 낯선 언어로 집을 구한다고 하니,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얼마 전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 수년 씩 산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서 집을 구하는 걸 보면서 "남향", "세입자", (전 세계 한국이 유일하다는)"전세" 이런 한자의 뜻을 모르면 알아듣기 어려운 부동산 용어들때문에 곤란을 겪을 것을 보니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런던에 살면서, 월 200만원의 월세가 너무 아까워 영국에 집을 사면 어떨까 생각도 해봤지만 외국인으로서 대출을 받는 것도 어렵겠지만, 영국은 집을 살 때 변호사를 끼고 산다고 할 정도로 집을 사는 일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영국에서 대학교수를 하시는 분께서도 10년 전쯤 집을 살 때였는데, 변호사를 끼고도 매도자 측이 연락도 잘 안되고 거의 잠수를 탄 상황에 가까워서 소송을 준비해야하나하던 찰나 연락이 되어 가까스로 입주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영국에 처음 상륙하는 사람이 집을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인가 싶다.
처음 영국에 들어갈 때 집을 매입할 건 아니니, 일단의 용어들과 일의 처리 과정, 임대자와 임차인의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에 대해 알아두는 게 마음고생을 덜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 외에도 효율적으로 집을 구하기 위해 출국 전에 해야 할 일이랄지, 알아야 할 사이트, 일정 짜기, 중개업소와의 관계, 집을 구한 뒤 후속 처리해야 할 일들, 나중에 집을 빼고 나갈 때를 대비해서 해야 할 일들 등 알아둬야 할 많은 것들이 있지만, 가장 기초적인, 영국에서 집과 주소가 가지는 의미와, 집의 종류별 용어와 그 의미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영국에 입성함에 있어, 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배적이고 중요하다. 한국에는 주민등록번호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고, 신분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런 기능을 하는 번호가 없다고 볼 수 있기에 모든 신분 보장은 주소를 베이스로 한다. -많은 나라들이 주민등록화하고 싶어 했으나 국민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이루지 못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전입신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주민세 Council Tax 신고이다. 공과금이나 세금을 내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주소가 없으면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 학교 입학 신청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집을 구하는 게 아주 급하고도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당연 그 이상으로 중요한 곳이 영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파트, 빌라, 주택 정도로 주택의 종류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디테치드 하우스(Detached House), 세미디테치드 하우스(Semi-detached House), 테라스드 하우스(Terraced House), 플랏(Flat)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영국 부동산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배(Boat)”도 부동산으로 취급해 분류하여 거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강가를 걷다보면 배를 주거로 이용하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카페나 레스토랑은 물론!
영국에서도 아파트라는 표현을 어쩌다 쓰기도 하지만, 주로 우리가 사는 아파트를 플랏으로 통칭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플랏이 우리가 생각하는 아파트랑은 또 다른다. 2,3층으로 쌓여 올라간 주택의 형태가 아닌 1개 층의 평면으로 1개 세대가 구성된 집을 모두 플랏이라고 한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니 플랏은 우리나라의 다세대 빌라나 아파트 모두를 칭할 수 있고, 특별히 고층인 것은 아파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영국 일반인들이 어디서부터 아파트로 부를 것이냐 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지만, 런던 시티가 아니고는 7층 정도의 건물도 잘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정도 이상을 아파트라고 말하면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생활하다 보면 아파트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게 된다.
런던 서남부에 살았던 경험으로는, 일반적인 중산층이고 가족생활을 하는 가정이라면 플랏에는 잘 살지 않는다. 아무리 좁다란 정원이라도 정원이 딸린 테라스드 하우스를 선호한다. 한국인들이 빌라보다는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라고 할 수 있는데, 프라이버시, 아이들의 놀이공간, 가족생활 여유공간, 구성원 측면의 안전과 쾌적성, 안정적인 삶과 같은 이유이다. 같은 부지에 공동 개발되었던 연식이 비슷한 플랏과 테라스드 하우스의 월세는 1.5~1.7배 정도 차이가 났다.
디테치드 하우스는 '따로 떨어져있는'집이라는 의미의 우리나라 단독주택과 일치한다. 물론 프라이버시 측면에서도 가장 훌륭하고, 정원이나 주차공간 등 생활이 윤택하기로는 디테치드 하우스가 단연 좋은 만큼 가격도 일반 주택들 중에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세미디테치드 하우스는 우리나라에서는 땅콩주택이라는 용어로 익숙한 집의 형태이다. 얼핏 보면 하나의 집처럼 생겼지만, 출입구가 두 개이고 마치 데칼코마니 같이 생긴 두 집이 붙어 있는 경우이다. 하나의 대지에 두 개의 집을 짓는 효율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테라스드 하우스보다 프라이버시가 지켜지고 살의 질이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테라스드 하우스는 우리나라에서도 타운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주택이 측벽을 공유하며 좌우로 길게 붙어 있는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테라스하우스도 고급주택의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테라스드 하우스는 18세기경 1차 산업혁명 시기 직물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열악한(?) 주거의 형태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2차 산업혁명 등 2차 세계대전까지도 꾸준히 도시의 산업 발달과 함께 고밀도 개발을 위한 주거 형태로 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테라스드 하우스 정도만 되어도 좁은 정원을 소유하고 있는 중산층의 주거 형태로 볼 수 있다. 내가 살던 킹스턴의 테라스드 하우스는, 방의 개수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월세가 400만원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