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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니 Aug 21. 2024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운전과 글쓰기의 공통점


초보운전자에게 가장 무서운 순간이 언제인지 아십니까.

물론 하나만 꼽을 수는 없습니다. 차선 변경을 해야 할 때, 급커브를 해야 할 때, 좁은 공간에 주차해야 할 때, 비 많이 오는 날 운전해야 할 때 등등.. 정말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최고봉은 바로 다른 운전자가 클락션을 내리칠 때입니다.


빵빵- 핸들 가운데에서 터져 나오는 그 소리는

잔뜩 찡그린 표정을 한 풍선이 불평불만을 내지르는 모습을 상상하게 합니다.

왜 경쾌하고 기분 좋은 소리는 없는 걸까요.. 위험을 예방하기 위한 거라면 볼륨만 크면 되는 거 아닙니까.. 험상궂은 표정의 소리는 초보 운전자를 잔뜩 위축하게 만듭니다.


내 잘못도 아니고, 나한테 그러는 것도 아닌데 순간 ‘내가 뭘 잘못하고 있나?’ 싶어지는 겁니다.

그러다가 진짜 실수라도 하게 되면, 클락션 소리는 더 크게 귀를 찌릅니다.

뇌까지 찔러버리는 그 소리에 굉장히 당황하게 되지요. 버벅거리며 실수를 수습하는 데 시간을 두배로 쓰고 맙니다.

그새를 못 참고 곧바로 눌리는 클락션에 또다시 당황.. 


오늘도 아침에도 귀를 찌르는 그 클락션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운전석에서 들은 건 아니었지요.


운동 다녀오는 길에 공원을 지나 길을 건너려는데, 교통체증이 생긴 걸 한 번도 본 적 없는 곳에 차들이 줄지어 서있는 겁니다. 세 네대의 차가 빵빵 거리는 탓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습니다.


체증을 유발한 차는 왜인지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저 같아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나 때문에 길이 막혀버렸고, 여기저기서 빵빵거리니 말입니다.  

혹시.. 초보운전자가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살펴보려고 가까이 다가가려던 찰나 마법같이 교통체증이 해소되면서, 다시 차들이 쌩쌩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수습한 걸 보니 초보운전자가 아니었나 봅니다. 혹은 (다행히도) 금세 차분함을 찾은 초보운전자였거나요.


늘 그렇듯 당황하지 않아야 빠르게 문제 해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운전 실수 혹은 그에 의한 교통체증이 생긴 경우 역시 차근차근 수습하면 되지요. (물론 알지만 잘 안 되는 것..)

클락션을 울리던 운전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 갈길 가고

꽉 막힌 도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운 표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글을 쓰면서도 종종 비슷한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클락션 같은 시계초침이 ‘아직도 그거밖에 못 썼어? 빨리 써!’ 하는 것이지요.


아주 간혹 있는.. 글이 쉽게 써지는 운 좋은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글을 씁니다.


그럴 때면 저기 북한산을 어깨에 옮겨 놓은 듯, 써야 할 글이 엄청난 무게로 다가옵니다.

굉장히 막막하지요.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글은 진도가 나가지 않고

고작 세문장 썼을 뿐인데 시간은 벌써 훌쩍 지나가있습니다.

그 상태가 당황스러워 살짝 패닉에 빠집니다.

여기저기 손대지만 해결되기는커녕, 체증 상태가 되어 초조하게 시간만 흐르지요.


운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패닉에 빠져있으면 글을 완성하는데 (즉, 수습하는데)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차분하게 하나씩 풀어가야 하지요. (이 역시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글을 쓰려는데 생각이 중구난방으로 정리되지 않는다면,

구성이든 문구든 알맹이든 하나의 멱살을 잡고 해결한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풀어가야 합니다.


조급함에 날뛰던 마음을 진정시켜 가라앉히고 나면

레고 블록을 순서에 맞춰 조립하듯, 문장과 단어가 차근차근 자리를 찾아갑니다.

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순간이지요.


능숙하게 운전하기 위해 반복된 훈련과 당황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한 것처럼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습과 인내만이 거의 전부이지요.

조급함과 조바심은 될 것도 안 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상황이 더 나빠지면, 제풀에 지쳐 영영 포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글쓰기가 쉬워지는 순간은 아마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의 어려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조급함도 익숙해져야 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떠오른

‘서두르지 않기’에 관한 좋은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

때는 어느 봄날 저녁인데 화자는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이제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앞에서 말한대로 그런 몸일 때만 찾아오는 생각들이 있어서 그것을 저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다.


(…)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그러니까 제 마음에 쫓기지 말자는 말이다. 한국어 문장으로서는 별로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는데도 저절로 외워져서 되뇌게 되는 매력적인 구절이다. 이 시 전체가 저 구절의 변주/확장이다. 숙취 때문에 뒹굴다 깨어나보니 벌써 저녁일 때의 낭패감과 억울함. 이 감정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시인은 묻는다. 그것들은 “혁혁한 업적"을 바라는 마음, 그러니까 빨리 꿈을 이루고 싶다는 갈급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는 자기를 제어할 필요를 느낀다. ‘개'와 ‘종'과 ‘달'이 밤이 왔음을 알려도 당황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다.


(…) 1연에서 그가 ‘같은 듯 다른' 세 가지를 함께 말했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싶다. 서둘지 말고, 바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라. 이 셋은 자주 엉킨다.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은데, 이룬 것이 없어 너무 당황스러울 때 그때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위험한 때다. 김수영이 걱정한 것도 그것이지 않을까. 빨리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마음에 지면 나를 잃고 꿈은 왜곡된다.

그러므로 서두르지 않는 마음이란 현실 앞에 의연해지려는 마음이다.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말이다. 달은 지구를 따라 끝없이 돈다. 이상(꿈)이 현실(삶)에 내려앉지 못하고 그렇게 겉도는/헛도는 사태를 보는 일은 괴롭다. 게다가 달은 차고 이지러지기를 반복하지 않는가. 김수영 자신의 꿈도 달의 모양처럼 날카롭다가 환했다가 비어 보였다가 그러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가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공전할 때 기차는 어디로건 자꾸 떠나니 그 기적 소리가 어찌 들렸을까. “과연" 쓸쓸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성마르게 시동을 걸면 안 된다고, 그는 또 제 욕망에 제동을 건다.

김수영의 꿈(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이 시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3연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김수영의 ‘수신'에 대한 강박은 본래 ‘제가'와 ‘치국’에 대한 열망과 이어져 있다. 이 시에서도 그의 근심의 대상은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까지를 포괄한다. 한국의 낙후된 정치사회적 조건이 언제나 그를 서두르게 했다. 그 형형한 눈에 너무 많은 누추한 것들이 보이니 괴로운 것이다. 오죽하면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가 될 것을 상상했겠는가.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묵묵히 나아가자는 것이다.


(…) 그가 절제를 “나의 귀여운 아들"이라 한 것은 그것이 ‘내가 낳았으나 오히려 나를 인도하는' 생각이기 때문이고, “나의 영감"이라 한 것은 그것이 향후 시작의 지침이 되어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릴케의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를 읽다 보면 마지막 구절인 “너는 너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에서 언제나 뜨끔해진다. 김수영의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역시 그런 구절이다. 이런 백발백중은 좀 신기하다. 그만큼 내가 언제나 ‘바꿀 필요가 있는' 또 ‘애타도록 서두르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뜻이리라. 최근에도 나는 어떤 글을 쓰는 와중에, 이 시를 다시 읽고 나서, 내가 조급하게 쓴 어떤 문장들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결국 ‘혁혁한 업적'을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워라. 김수영이 김수영이어서 괴로웠던 것은 김수영뿐이고, 우리에게는 그가 있어 온통 다행인 일들뿐이다.


『인생의 역사』신형철, <절제여, 나의 아들, 나의 영감이여> 中



[글쓰기 단상, 또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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