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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니 Aug 17. 2024

도스토옙스키도 이렇게 썼다. 잘 쓴 글의 선행 조건


얼마 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습니다. 1,300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입니다. 긴 분량도 마다하지 않고 읽게 한 건 왠지 모를 끌림이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유명세와 비극적인 생애, 작품 목록은 알고 있었지만 읽어본 소설은 없었지요. 익히 들은 난해함과 어려움, 분량 때문에 쉬이 집어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읽은 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그의 작품이 제 취향에 맞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희망보단 절망을, 행복보단 슬픔을, 밝음보단 어두움을, 인간의 선함보단 악함에 관한 이야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고대인들이 그리스 비극을 보며 카타르시스, 감정적 정화를 경험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옙스키에 끌리는 것도 이 때문인 듯합니다. <죄와 벌>을 읽고, 다시 한번 알았습니다. 확실히 나는 이쪽이(?) 취향이야.



표현력, 통찰력 갖춘 다크 초콜릿

도스토옙스키는 정말.. 짙고 무거운 스모키향과 우디향이 나는 작가이자, 진하고 쌉싸름한 다크 초콜릿 같은 작가입니다. 묵직함은 단연 그의 문체에서 나옵니다. 죄를 저지른 주인공의 독백을 듣다 보면, 심리 상태에 깊게 몰입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책감이 심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정신적 고통을 느끼게 되고요. 심리 묘사,, 정말 장난 없습니다. 긴장감, 압박감, 내적 갈등, 불안정한 상태, 혼란스러운 감각이 휘몰아칩니다. 이렇게까지 극한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고? 싶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표현력도 표현력이지만, 인간 심리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도 엄청납니다. 그를 두고 니체는 “도스토옙스키는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이다.”라고 했을 정도이지요. 심리학자 프로이트 역시 도스토옙스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요. 



길고 깊게 쓴 이유

그가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렇게’에는 ‘길게’와 ‘깊게’가 있습니다. 

길게 쓰는 데엔 경제적 이유가 한몫했습니다. (말을 받아적어서라거나, 퇴고할 시간이 부족해서였다거나, 복잡다단한 인간 심리를 표현하는 데 세부적 묘사가 필요해서라는 세부적인 내용은 차치하고 대표적으로 꼽히는 이유만 이야기하자면요.) 도스토옙스키는 도박 중독으로 빚더미에 허덕이며 생활고에 시달렸지요. 당시엔 글자 수대로 고료를 측정했기 때문에, 소설 길이만큼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깊게 쓴 데엔 그의 성향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 봅니다. 가난했던 유년 시절과 사형 직전 풀려난 경험, 시베리아 유배, 발작을 되풀이하는 뇌전증 등 삶의 여러 요소가 근간을 이뤘을 것이라고요. 


이 ‘길게’와 ‘깊게’는 상호 보완 관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뇌전증 환자에게서, 글쓰기 충동을 참을 수 없는 ‘하이퍼그라피아’라는 증세가 나타난다고 하죠.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는 없지만, 뇌전증이 삶에 영향을 준 건 분명했을 겁니다. 이 질병을 포함한 주변 환경 역시 그가 쓰는 일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고요. 반대로, 이렇게 계속 길게 쓰다 보니 글이 깊어진 부분도 있겠지요. 


좋은 글은 역시..

재주가 있는 사람이 글까지 많이 쓰니 이런 명작이 나올 수밖에요.

역시 글쓰기에 있어서는 ‘양보다 질’이 아닌 ‘질보다 양’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글은 많이 쓰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지요.


뭐 이렇게 당연한 말을 하나, 싶겠지만 이 당연한 걸 못 하는 게 태반입니다. 당연히 저도 포함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뇌면서 계속해 제게 각인시키는 겁니다.

더 이상 당연한 말에 머무르지 않고, 당연히 매일 하는 일이 되도록 말입니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만큼 쓴다고 그처럼 될 순 없습니다. 

그 타고난 기질과 주변 환경을 훔쳐 올 순 없으므로 (물론 그러고 싶지도 않긴 합니다만..) 많이 쓰는 일이라도 해야겠지요. 


재능 있는 이도 그러한데, 평범한 제가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이런저런 핑계 말고, 딴생각도 말고, 글쓰기가 생존인 사람처럼 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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