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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니 Oct 01. 2024

예상 가능했고, 예상하지 못했던 - 김훈 <허송세월>

그의 글을 보며 우리에게 필요하다 느낀 건

읽어본 김훈 작가의 책이 없다. 높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한권도 들춰보지 않은 것은 이름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다. 진행하는 글쓰기 독서모임에 ‘문장가의 책’으로 그의 책을 넣고 싶어, 그나마 부담이 덜한 에세이를 골라 넣었다. (분명 김훈 작가의 글을 읽지 않은 이들도 나와 같은 이유와 니즈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의 글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허송세월>을 펼쳤다.


첫인상은, 품은 이야기 많은 노인과 차 한잔하며 혹은 술상 앞에서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마음 여는데 시간이 필요한 이 성가신 성격은 사람뿐 아니라 책에도 낯가림을 한다. 초반에 데면데면하느라 읽는둥 마는둥하다가 중반부부터 몰입해 읽는 편인데, 이 책은 반대였다. 1부에서 곧바로 이야기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가 2부에서 흥미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 재미있는 이야기가 분명함에도 같은 사람 입에서 매일매일 들으면 이말이 그말같고 그말이 이말 같아 그랬다. 하지만 3부는 또 달랐다. 역시 이야기꾼은 이야기꾼인가. 


‘이런 사람은 공상, 문제제기, 단정한 마음만으로도 책이 되는구나.’ 싶었는데, 그보다는 ‘이 정도로 밀도 높은 생각과 화두를 끌어가는 지구력, 넓으면서도 깊은 안목이 있어야 사람들이 오래 찾는 글이 되는구나.’ 쪽이 더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부담이 덜할 거란 예상은 맞았을까? 보통의 에세이가 주는 가벼운 느낌과는 확실히 달랐다. 살아온 시간(76세)과 글을 써온 시간(약 50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술술 읽힌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글에서 파생된 생각이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가끔은 따라가기 벅차 딴짓도 하고, 3초에 한번씩 주의를 잃어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최근에 이런 느낌으로 읽은 에세이가 두 권 있는데, 이승우 작가의 <고요한 읽기>와 <소설가의 귓속말>이다. 김훈 작가보다 열살정도 어리지만 이승우 작가 역시 중견 작가이고, 깊이와 치열한 글을 쓰기로 유명한 사람이라 더듬더듬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소설가, 아니 이승우는 어떻게 읽고 쓰나')




여기까지는 예상 가능한 범위였다면, 예상치 못한 건 지금부터.


1.

김훈 작가의 글을 접한 적도 없으면서,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그의 글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철학적일 거라고. 그러나 반대였다. 일상적이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심지어 본인 입으로 세속적이라 말하는 글. 현실과 동떨어진 글에 의미와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이 뉘앙스로, 인상으로, 행간의 생략된 의견으로 전달되었다. 머릿속에 그린 이미지와 달라 뜻밖이었고, 궁상 맞은 표현과 허심탄회한 주절거림이 의외의 재미 포인트였다.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닌 것 같긴 함) 웃긴 대목에는 빠짐없이 밑줄을 그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소독약 냄새 풍기는 젊은 의사는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더 젊은 간호사는 날 보고 ‘아버님’이 란다. 나쁜 아니라 늙은이를 보면 닥치는 대로 ‘아버님'이다. (…) 복도에 대기자가 많으면 김 아버님, 박 아버님이라고 불러댄다. 이런 호칭을 들으면 모욕을 느끼지만, 아프니까 별 수 없이 병원에 간다. 내가 젊은 간호사를 "딸아" 하고 부르면 나를 미친 늙은이로 볼 것이다. p.34


남자1은 야당 지지자이며 여당 저주자였고 남자2는 여당 지지자이며 야당 저주자였다. 지지와 저주가 한 세트로 묶여 있었다. (…) 남자1과 남자2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말들을 들어대며 야당을 찬양하면서 여당을 욕했고, 야당을 욕하면서 여당을 편들었다. 간호사가 들어와서 혈관주사를 놓으면 남자1과 남자2는 조용해졌고, 처치가 끝나면 또 시작했다. 나와 대각선 모서리에 있던 남자3은 핸드폰으로 쉴 새 없이 통화했다. 남자3의 목소리는 남자4(나, 김훈)에게도 들렸다. 통화 내용으로 짐작건대 남자3은 전국 여러 곳에 수입 아이스크림 매장을 벌여 놓은 자영업자였다. 남자3은 야당 편도 아니고 여당 편도 아니고 오직 아이스크림 편이었다. p.76


김훈 작가 나이만 듣고 고리타분할 거라 생각했던 나.. 선입견 가득이었어. 반성해.. 


요즘은 글을 재미있게, 더 나아가 웃기게 쓰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라는 생각이다. 

쓰는 사람도 웃기고, 읽는 사람도 웃을 수 있는 그런 글. 


2.

책은 분명 좋은 글로 가득하다. 주는 것도 많다. 예술적인 문장의 미감, 날카로운 통찰력, 깊은 안목과 식견 등 많은 가치가 있지만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준 건 따로 있었다. 이 책 묘미는 세상에 대한 감탄이었다. 아름다운 문장을 보려고 고른 책인데,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감동하는 능력에 감명했다. 


“내가 지난해 12월 중순 대룡시장에서 가래떡을 사 먹으며 골목에 앉아 있을 때, 인천 마천초등학교의 젊은 선생님이 6학년 아이들 30여 명을 데리고 이 시장에 와서 시장 가게 처마 밑의 제비집을 보여 주면서, 제비를 반가워하고 제비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이날 시장에서 젊은 선생님과 아이들을 만난 일을 내 생의 큰 기쁨으로 꼽는다.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이 이처럼 쉬워서 나는 기뻤다.” p.276 


나는 이런 대목에서 감동의 간접체험을 한다. 직접 경험했을 때의 그 감동은 얼마나 클까, 상상도 해보면서. 

문장도 문장이지만 그보다 부럽고 질투심이 들고 훔치고 싶은 건, 작가의 이런 눈과 마음과 감각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내가 진정하고 싶었던 이야기.


하고 싶은 말과 뱉어내고 싶은 감정이 있는데, 무어라 말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안에 담아두기만 한 말들이 너무 많다. 형태가 아닌 형태로 묵혀두고 재워두다가,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면 그제야 깊게 묻어둔 장독 안에서 들춰 꺼내 올리는데 사실 그런 일은 자주 (아니 거의) 없다. 사는 일이 바빠 금방 잊히기 때문이고, 내 안에 있는 걸 깊이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탓이고, 파편화된 문장과 단어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인내심이 없는 탓이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정확히 짚어주는 문장을 만난다. 그러고 나면 손이 안 닿는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듯 쾌감에 눈이 번쩍 뜨인다. (사실 여기에 글쓰는 이유도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내 손을 빌어 정확하게 했을 때의 쾌감은 타인의 문장을 만났을 때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문장이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정확함의 쾌감에 더 크게 감명하고 반응해 마음에 남는 거다.


유독 마음이 불편한 문제들이 있다. 그런데 왜 불편한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내 마음은 분명 이런데, 왜 그에 대해 설명조차 할 수 없나. 난 말할 자격도 없다, 싶어 입을 닫았지만 갑갑했다. 그런 나의 파편화된 말의 조각은 김훈 작가의 글로 가시화 되었다. 답답하던 속이 뻥뚫리는 듯한 감각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 


*세월호에 관해

유럽의 대항해 시대나 증기선 시대에 위험에 처한 배에서 승객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배와 함께 최후를 맞는 영웅적 선장들을 끌어대면서, 혼자서 먼저 도망친 이준석의 비열한 행동을 성토하고, 구조 임무를 맡고 현장까지 와서 기우는 선체 안으로 진입하지 않고 배 언저리에서 우물쭈물했던 구조세력의 무능을 규탄하고, 세월호를 증축하고 과적해서 이윤을 추구했던 청해진 해운 회장 유병언의 반사회적 탐욕을 극언으로 비난하는 언설 행위는 필요한 일이기는 했으나, 그렇게 비분강개한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으로 이 사회 토대의 질병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이준석, 김경일, 유병언에게 독박을 씌워서 뭉개질 일의 아니라는 말이다.
충격으로 넋이 빠져 있던 한동안이 지나자 참사 자체를 일상에서 떼어 내서 원격지로 몰아 고립시키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슬픔이라는 정서는 전망 없고 폐쇄적인 심리 현상이고 한에 침잠해 있으면 개인의 삶은 퇴행하고 국가 경제가 오그라져 먹고살기 어려워진다고 말 힘 좋은 논객들이 말했다.
'일상으로 돌아가자!'가 그 깃발이었고 '극복'이 표제어였는데, ‘극복’을 외치는 이 깃발은 사태의 심층구조를 우회했고, 일상 속에서 밥 먹듯이 거듭되는 죽음과 통곡을 외면하고 있었다.
2016년 봄, 이 사건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대법원의 선고가 끝났다. 이때부터, 문제가 모두 일단락되었으니 ‘일상으로 돌아 가자’라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 참사는 대형 ‘교통사고’ 이며 그 희생자들은 재수 없이 그 사고에 얽혀든 불운한 소수의 사람들이므로 적절한 보상과 조문과 위령의 의전을 베풀어 줌으로써, 이 우연한 사태가 산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의 영역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하고, 소비경제에 미치는 심리적 악영향을 막아 경기를 활성화하자는 것이 세월호 ‘극복’ 움직임의 핵심적 논리였다. 이 ‘극복’ 움직임의 상당한 부분이 정치권력에 의해 작동되고 있었다는 것은, 증명할 수는 없지만 다들 알고 있었다. 114-115p


정상적인 사유 능력과 감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 참을 수 없이 단순한 원시성과 한 세기에 걸친 불변의 무지몽매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데, 죽음이 망각에 묻혀 일상화되면 사람들은 절망을 절망으로 인식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120p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재해에 관해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준비가 되지 않은 까닭은 지난 2년의 준비기간 동안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준비하지 않으면 준비는 되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고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그 ‘무엇’을 준비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 마나 한 소리다. 법조문이 모호해서 무엇을 할지를 몰랐다고 하는데, 사업장 최고책임자가 날마다 루틴하게 돌아가는 작업 과정에서 어느 장소, 어느 단계, 어느 위치가 위험한지를 어찌 모를 수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돈이 없어서 안전설비를 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생산 과정에 투입 되는 자금의 항목 중에서 안전비용의 크기와 순위를 맨 밑바닥에 설정해 놓고 정부가 주는 돈과 조치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동안 여러 작업장에는 주검들이 쌓여 갔다.
사업주가 처벌받으면 공장을 돌릴 수 없어서 다들 밥 못 먹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도 맞는 말이다. 나는 이 ‘맞음’의 밖을 말하려 한다.
일자리가 모자라서 밥 먹기 어려운 시대에 밥 없는 사람들을 밥으로 겁박하면, 사람들은 밥과 죽음의 기로에서 밥 먹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밥과 죽음이 섞여 있는 자리를 향해서 밥 없는 사람들은 가고 또 간다. 살려고 먹는 밥숟가락 속에 죽음이 들어 있다. 날마다 거듭되는 죽음이 빤히 보이는데 동료 인간의 목숨을 ‘유예’하는 조건으로 공장을 돌려서 나의 밥을 먹고, 내가 재수 없으면 나의 목숨을 동료 인간의 밥의 토대로 바쳐야 한다면 이런 밥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밥이 아니다.
밥을 벌어먹으려다 죽은 사람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별수 없이 또 밥을 벌러 가야 하는 사람들을 향해, 지난 2년 동안 아무 준비도 안 한 사람들이 내가 감옥 가면 너희들은 모두 밥 못 먹게 된다고 하는 말은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들이대지 말고, 무엇을 우선 할 수 있는 지 말하는 말을 듣고 싶다. 121-122p


날마다 발생하는 ‘소형사고’의 누적된 피해자들이 ‘대형사고’의 피해자들보다 훨씬 더 많으니까, 거듭되는 소형사고는 ‘초대형사고’입니다.
사망자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사고의 중대성을 등급 매기는 사회적 관행은 생명을 물량으로 취급해서 사물과 동일시하는 몰인격적 인식일 것입니다. 날마다 죽고 다치는 참사가 일상화되면 그 사태를 바라보는 인간의 감수성이 마비되어서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해결을 향해 나아가는 능력을 마비시킵니다.
이 죽음과 고통은 이 세상의 본래 그러한 모습이고 이 사태는 보기에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경제를 움직여서 다들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라는 현실인식과 자기기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이 세상이 날마다 조금씩 서서히 망가져서 결국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그 망가짐이 또 다른 질서로 자리 잡게 되면 사람들은 망가진 세상의 야민성을 의실할 수 없이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게 집단정서가 형성되면 문제를 개선할 길은 영영 멀어질 것입니다. 302p



자꾸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지겨우니 그만 하라는 사람들에게, 발본색원의 움직임을 희생자 유족의 욕심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사고 원인 제공자와 이익 당사자가 같다는 걸 모르고 그를 제외한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짓밟으려는 사람들에게, 이윤만이 최대 가치인 사람들에게, 인간을 물량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정확히 말해주는 거다. 


이게 바로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가족과 친구를 지키기 위해 쓰는 이유다. 

그렇기에 글쓰기는 무기가 될 수 있고, 나를 지키는 보호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김훈 작가는 좋겠다. 

어떤 단단한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웬만한 창으로는 뚫기 어려운 방패를 가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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