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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크립씨 Nov 04. 2023

계시를 받다

2005년 여름

“사학과를 향해”


사회과목을 좋아했고 심지어 꽤 잘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더 얘기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다. 내가 ‘공식적으로’(?) 사회과목에 소질이 있었다는 것을 쓰고 싶었고, 15년도 더 전에 받았던 상장을 보여드리는 것으로 증명을 하려했는데 도무지 상장을 어디에 뒀는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정말 있었던 일이니까 내 말을 믿어주십사 한다. 그 날은 중학교 2학년 1학기를 마무리할 시점이었던 것 같다.


교실 앞으로 나오란 말을 듣고 가볍게 튀는 발걸음과 하늘로 솟아오를 것 같은 어깨와 함께 앞으로 나갔다. 이내 내 손에도 상장이 주어졌다. 사회과목 교과우수상. 내 자리로 돌아올 때는 쑥스러움과 뿌듯함을 두 개의 어깨로 표현하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흰 종이와 검은 잉크에 불과했던 그 종이가 혹여나 구겨질까 싶어서 얼른 파일집에 집어넣고 가방에 고이 모셨다. 그 날의 일기 같은 것은 없어서, 그 당시 나의 심정을 정확히 알 턱은 없겠지만, 분명히 들뜬 마음이 가슴을 비집고 나오려 했으리라.


그 상장을 마지막으로 ‘서양사’라는 "애매모호한" 파트를 중학교 2학년 1학기에 끝을 맺었다. ‘사회과목 교과우수상’을 받은 사실은 나로 하여금 더욱 어깨가 으쓱거리게 했다. 아마도 100점을 한번 맞았거나 다른 학우들보다 조금 잘한 것을 이유로 줬던 격려상 정도였겠지. 그러나 서양사에 푹 빠져 있던 어린 나로서는 교과우수상이 꼭 하나의 ‘계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사학과로 진학해야만 한다’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정작 사학과에 들어섰을 때는 내가 생각했던 역사 과목과 대학교 수준의 그것과는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을 뿐 아니라, 내가 아주 잘하는 축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 물론, 이 생각은 지금도 꽤 유효하다).


냉전시기를 마무리하며 1학기의 사회과목이 끝났던 것으로 생각한다. 어찌나 아쉽던지. 조금 더 길게 그리고 깊게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시절의 교육과정은 ‘의무 과정’이라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걸. 아쉬움을 마무리하고 그 즈음하여 서양사에 관련한 책을 몇 권 사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중학생을 위한’ 혹은 ‘청소년을 위한’ 같은 어구가 붙은 기초적인 책들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꼭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가 될 것만 같다는 – 심지어 이미 된 것만 같다는 (?) – 생각으로 가득 찼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습게 보이고 오만해 보이겠지만, 어깨 으쓱할 일이 별로 없었던 사춘기 소년의 우쭐함으로 봐주었으면 한다.




이 시기의 나를 돌이켜보면 ‘본인의 진로는 본인이 오롯이 결정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 사회교과서의 첫 단원이 서양사가 아니라 다른 것이어서 내가 다른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사회과목 교과우수상 타는 것을 실패해서 ‘인생의 좌절’(?)을 맛보았다면? ‘그랬다면 내가 서양사에 더 깊숙이 빠져들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학교/대학원을 다니던 시절에도 나의 진로는 정말이지 나의 의지 100%로 정해진 것은 없다. 우연의 순간들이 만나 오늘날 나를 만들었다. 운명론적인 말로 들릴 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연의 순간들이 모여서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께서도 직업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떠한 우연한 순간들이 모여 그 일을 하고 있는가? 한번 추적해봤으면 한다. 분명 소소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지나온 삶의 궤적의 군데군데 새겨져 있을 것이다.


아!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사학과랑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 볼 예정이다.


독일사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내 전공은 프랑스사였다. 아무튼 그 덕분에 프랑스로 몇 번 연구도 가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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