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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록 Feb 26. 2023

진짜 '권고사직'의 추억

번역행정사 김서록 과거사 - 스타트업 D사 재직 에피소드 II

권고사직이라 함은 사측에서 근로자에게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권유'하여 근로자가 이를 받아들여 사직서를 제출함으로써 퇴사하는 것으로, '해고'라는 가슴 시린 단어를 대신할, 에두른 표현으로 이해한다. 



20대가 퇴사를 권유받는 일은 흔하지 않은데, 특히 스타트업 D사에 재직하며 받은 퇴사 권유는 더더욱 흔치 않은 방식이었다. 


D사는 지금 생각해도 독특한 구석이 있었는데, 사무실을 다른 스타트업과 공유함으로써 흡사 '창업센터'의 분위기를 풍겼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가상의 공동체 하나를 중심으로 각각의 구성원들이 뭉쳐있는 분위기였다. 아마, D사의 대표님이 그 스타트업들의 의장이거나, 후원자이거나 자문역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D사와 친구들'은 호칭에서의 자유분방함을 공유했는데, 서로를 '형 누나 언니 오빠'라고 불렀다. 평범한(?) 중소기업에 다니던 내겐 일종의 문화충격이었지만, 여기서 나 자신과 타협을 본 방식은 D사에 속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직함으로 호칭하되, 타 스타트업 구성원에는 언니, 오빠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D사와 친구들'은 그런 관계 속에서 같이 회식을 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점심을 같이 먹기도 했다.


이날은 'D사와 친구들'중에 제일 잘 나가는 Q사 ('Q사와 친구들'로 쓰는 게 맞을 수도) 구성원들과 점심을 먹은 날이었다. 각자 먹을 메뉴를 주문한 뒤 기다리면서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 앞에 앉은 Q사 대표님이 물었다. 


"회사는 좀 어때?"


입사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시점이니, 지나가는 얘기로 물어볼 법한 평범한 인사치레였다.   


"좋아요. 다들 잘해주시고. 덕분에 벌써 1년은 넘게 다닌 기분인걸요." 


나는 두 엄지를 치켜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Q사 대표님은 '오호'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떤 업무를 맡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맡은 업무에 관해 설명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왠지 이글거리는 듯, 다소 와일드한 눈빛으로 바뀌더니 갑자기 물었다. 


"그 업무, 잘해?"


분명 단도직입적인데, 무슨 의미로 물은 건지를 알 수 없었다. 

잘하냐니, 잘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아직 갈 길이 멀다며 한국인 특유의 겸손을 떨어야 할까? 

당황스러웠지만 어려운 자리가 아니어서 길게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얼마 되진 않았지만, 나쁘지 않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자, 그는 양팔을 낀 채로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더니 말했다. 


"그래? 나쁘지 않게 하는 거 말고, 잘해야지."


그가 거기서 말을 마칠 줄 알았다. 그랬다면 직장 선배나 상사가 했을 법한 아주 일상적인 대화가 되어 기억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그는 확실히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회사 그만둬야지." 

 

또라인가? 순간 벙찐 채로 생각했다. 이사님과 동석한 자리에서 이런 소리라니. 내가 일을 잘 못한다는 평가가 있었나 싶기도 했고,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대표님 옆에 앉은 Q사 언니는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아니 오빠 지금 갑자기 무슨 소리야...'라며 낮은 소리로 복화술을 선보였다. 그는 자신의 말솜씨가 수려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듯 짧은 문장을 조금씩 덧붙여 나갔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업무, 네 것으로 만들어. 사업할 수 있을 정도로. 이 회사 그만두고 그걸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그가 말을 마치자, 옆에 앉은 다른 구성원은 '쟤 또 저러네'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말이라고 내게 말했다. 그러자 Q사 대표는 아랑곳 않고 '아, 왜 - 내 말이 맞잖아'라고 말하며 투덜댔다. 이때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고, 대화 주제는 금세 바뀌었다. 


그렇게 끝난 짧은 대화이지만,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그 대화에서 느꼈던 의구심이 깨달음과 공감으로 변해서일까. 그 이후 누구도 그렇게 묻지 않았고누구도 그러한 방식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결국 사직서를 썼다. 나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하여, 온전한 나로 살아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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