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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K Oct 21. 2023

성장형 정체성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 의심과 싸우기


내가 만약 나를 최고라고 생각했다면,

딱 거기까지 였을 거다.

한번 정상에 올라본 사람.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믿음을 갖고,

기대감을 갖고,

새로운 것에 계속 도전한다.


골프 감독 겸 방송인 박세리, 2021년 3월 엘르 인터뷰에서



‘그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한다’는 것이 내 인생 신조다. 어찌 후회와 눈물이 없으랴. 가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한 노력이 두려워 현실에 안주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도 있고, 현재의 만족에 눈멀어 더 큰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그렇지만 ‘환승’에는 강렬한 정서적 욕구와 타이밍의 신호가 오리라 믿는 편이라 오늘도 가만히 병원으로, 수술실 간호사로 출근한다.


클라우드 파일을 정리하다 간호학과 2학년 즈음 썼던 ‘간호의학용어.mp3’ 파일을 발견했다. 의학용어를 외우면 임상 실습에 도움이 되겠지 싶어 스스로 공부했던 시절, 책의 부록을 열심히 들었다. 대중교통을 탈 때마다 계통별로 구분된 파일을 골라 의학 용어의 영어와 한국어 뜻을 듣고 철자와 발음을 익혔다. 가만히 흘려 듣는 시간이 많긴 했지만, 종종 에너지나 집중력이 남아있을 때는 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단어를 외우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지런하고 열심히인 시절이었다. 명확한 목적이 있어서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른다. 직간접 경험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많이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지방대학에 다니면서 서울의 BIG5라고 불리는 대형 병원 취업을 준비한 건 그래서였다. 누군가는 사회적 인정이나 월급을 좇아 간 것이 아니냐 물었지만 글쎄, 그랬다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국립대병원에 갔을 것이다. 두 곳의 병원에 최종 합격했고 이름만 대면 아는 그 병원을 두고 경기도에 있는 지금 병원에 온 것은, 취업 준비 과정과 면접 과정에서 느껴졌던 인재를 뽑겠다는 열의와 관심도, 선진성 때문이었다. 



지금 병원에서 서류 합격 이후 온라인 인적성, 조직적합성 검사를 치르고 다대다 면접, 30분 간의 이대일 면접, 최종 경영진 면접까지 거치는 동안 '우리는 너희에게 관심이 많아.'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향후 내 꿈, 현 직장에서의 장래성, 생활 비용, 거주 환경 등을 따져 지금의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다수의 동기들이 선택한 길과 다른 길이라 조금 외롭고 낯설기도 했다. 차분한 도전 정신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던 대학 시절을 지나 상대적으로 개방에 열린 병원 - 적극 운영되는 자율적 혁신 활동이라든지 직원의 심리적, 정서적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 등 - 에 이내 적응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며, 어떤 일에서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끼게 될 지는 명확하지 않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세상은 그것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내 마음의 욕구와 만족도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그렇지만 예전에 배움과 성장에 대한 열정 가득한 학창 시절을 보낸 나를 기억한다. 그 때 성공해 본 경험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오늘도 뭔가를 익히고 시도해보면서 일상의 확장을 꿈꾼다.


어느 정도는 업의 전문성에 대한 욕심, 나의 지식과 기술 성장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긴장과 자기반성은 항상 이어진다. 동시에 커다란 대학병원에서 나의 역할은 지금 이 순간 병원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 안정적이고 튼튼한 톱니바퀴의 일환이 되는 것이라는 것도 안다. 한 치의 실수가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담감과 지식과 감정 노동에 대한 요구를 계속 가지면서, 교대 근무자면서, 가임기 여성으로 결혼, 임신, 출산으로 인력 변동성이 큰 간호직종의 특성상 계속 임상을 고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때때로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치기에 매일이 평온 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잠시 멈추어 서게 되는 순간, 자주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 순간을 기억하고 의미를 곱씹는다. 내가 믿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는 가치의 힘을 되새긴다.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고, 어쩌면 해야하는 것도 전부일 터다.




기사 출처 : https://n.news.naver.com/entertain/article/009/0004755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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