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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K Oct 21. 2023

경험적으로 알아갈 수 밖에 없는 일들에 대하여

신규 수술실 입사자 교육의 고충 



타불라 라사tabula rasa는 라틴어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석판'이라는 의미로 타불라는 태블릿tablet, 즉 판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존 로크는 그가 주장한 경험론처럼 태어날 때 사람의 심성은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석판, 즉 타불라 라사와 같다고 생각했다.


로크가 도달한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일이든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 즉 현실 세계에 관한 이해는 직접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에 의해 이끌리든가 아니면 간접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요소가 바탕이 된다.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야마구치 슈 저,

82~84, '타고난 능력이란 없다, 경험을 통해 인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타불라 라사, 존 로크' 편




아직도 같이 일하는 선생님에게 욕을 먹어가며, 힘든 시간을 보내는 신규 선생님이 계시다. 그 선생님도 독립한 지 몇 달이 되어 이제 일정 수준의 역할을 하리라 기대되는 시기다. 비슷한 시간을 겪어 온 그의 동기는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여서 유독 그가 눈에 띈다. 다른 동기들과 비교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신규 생활의 희노애락을 나누고 실수나 선생님들의 피드백을 공유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걸까? 그 때는 사회 생활과 조직 문화를 이해하는데, 수술장에서 벌어지는 각종 오해에서 벗어나는 요령과 실수를 예방하기 위해 동기들의 경험담이 큰 도움이 될텐데. 각자의 배움의 속도는 다르다지만, 비슷한 지적을 몇 달에 걸쳐 계속해서 받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자는 병원이 대학성적과 토익의 최저 커트라인 이후에 블라인드 채용 과정을 거치면서, '운 좋게' 들어 온 친구가 아니냐 이야기하기도 한다. 공통 필수 교육 과정을 거치고, 임상 실습을 수료하고, 간호사 국가고시를 거쳐 평균적으로 기대되는 지식 수준이 있는데 이에 미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대인 관계와 사회 생활 기술은 사실 학창 시절 만으로는 길러지기 힘든 것이라 논외로 하더라도, 그 선생님은 뭔가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 많이 더딘 모양이다. 공부했다고 대답하면서 기억하지도 실제로 행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자꾸 혼이 난다고 했다.


그와 함께 일하면 신경 쓸 일과 말이 너무 많아지기에 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저 함께 일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혹시 그의 능력을 믿다가 실수를 거르지 못할까봐 자주 도와줄 부분이 없나 지켜보고 피드백해주며 일을 할 뿐이다. 응원을 하기에는 기죽어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보이고, 그를 지지해 줄 동기들이 곁에 있다. 칭찬을 하기에는 태도나 행동이 노력하여 변화하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그만두고 싶어하는 것 같지도 않고, 야망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사람을 잘 모르겠다. 방관자도 교육자도 아닌 나를 미워할 지, 고마워할 지, 아니면 아직 직접적인 관계가 아니기에 아무 생각이 없을 지도 종잡을 수가 없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동료로 일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경험을 평등하게 공유하고, 성장의 기회를 함께 가져야 하기에 내가 익혀서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도 조율하여 경험을 나눈다. 그의 개성과 성장 속도를 존중하고, 각자의 기질이 가지는 장점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상대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아야 한다. 비록 상대가 의지가 없거나 내 기대의 프레임과 달라 끊임없이 도전받는 존중과 존경이 되더라도.


그가 나의 프리셉티(선임 간호사인 프리셉터가 전임하여 교육을 수행하는 신규 간호사)였다면, 바로 직접적으로 함께 일하는 동료였다면 나는 어떻게 대했을까? 사람은 단순히 글과 사진으로 습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단 교육과 성장을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 뿐 아니라 경험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과 기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절대적인 시간과 기회를 그는 얼마나 필요로 하는 걸까? 섬세함과 신속, 정확한 멀티 플레이어의 속성이 동시에 요구되는 수술실 세계에서 그는 어떻게 적응하고 달라질 지 궁금하다. 교육의 순간에 참여하는 것은 나 뿐만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삶의 여러 순간에서 배움과 적응의 과정은 피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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