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수많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존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을 공평하게 축적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특정 순간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각자 다르며, 그것은 우리의 인격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우리들 각자는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세부 사항들을 인식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을 기억하며, 그 결과 구축된 이야기들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숨>> 테드 창
301쪽,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주말 동안 본가에 다녀오면서 나보다 몇 살 많은 어른들 사이에서 행복했다. 모두 각양각색의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내고 막막하고 불안했던 취업준비생 시절을 거쳐 지금은 제 자리에 있는 느낌이다. 사회경제적 지위와 안정성 보다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몇 년후의 모습을 그려볼 줄 아는 시야에 서 있다는 느낌. 각자의 고민과 고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웅크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세상과 맞서 삶의 즐거움을 찾아내겠다며 생의 한가운데 있다.
조금 속상한 일도 있고, 그래도 나를 아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도 있어 다행스러운 날이다. 선임의 의도를 확인하고 행동했음에도 선임의 플랜대로 되지 않아 면박을 샀고, 눈치를 보며 불편했다. 응급 수술 지원을 하면서도 찾는 소모품, 기구마다 제자리에 없어 시간이 지체되고 동선이 흐트러졌다. 내 잘못이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속이 상한 건 상한 거다. 같이 잘 지내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똑부러지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감정과 생각에 매몰되면 안 된다.
함께 눈치 보며 공감대를 형성한 동기가 있고, 우당탕탕 엉망이었던 수술 지원에도 퇴근길 잘 가라며 웃어주신 선생님들이 있다. 집에 도착해서 전화와 톡으로 문자를 나눌 친구와 가족이 있다. 다정한 사랑으로 다가온 꽃다발은 여전히 향기를 뽐내주고 있고, 아끼는 후배와 친구와 만나 회포를 풀 기회도 있다. 깜짝선물로 건강 잘 챙기라며 영양제를 선물해 준 오라버니 아닌 오라버니 J도 있다. 이 정도면, 오늘의 이야기는 괜찮지 않을까?
수술실에서 생사의 길을 오가는 장면을 왕왕 보다보니, 자주 죽음을 생각한다. 지금이 마지막이라면, 후회없는 하루일까. 오늘이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이래도 진심을 다했을까. 내 마음을 다 전하고 최선을 다해 아끼고 상대를 위해 함께 손 잡았는가. 그래, 그랬으면 되었다. 각자 얼마나 힘든 일이 많은가. 잘 나가는 친구는 상상을 뛰어넘게 날고 뛰고 있으며, 사랑받기는 얼마나 사랑받는지. 그래도 그게 다 내게 무슨 소용인가. 외부의 자극에 내면까지 흔들리고 탁해지지 않겠다. 비교 앞에서 초라해지고 약해지는 마음도 마주하지 않겠다. 작게 또 부지런히 살아가는 나같은 소시민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게 자주 아껴주며 행복을 찾는 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