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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K Oct 21. 2023

수술실 간호사의 기대와 현실 사이 균형잡기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에 대해서 더 잘 깨닫다


수술실 밖에서 무심히 만난 창밖 풍경은 삶을 긍정하게 한다. 원내 신관 수술실 일부는 탁 트인 방화창이 자리잡고 있다. 오후 늦게까지 수술을 하면서 오가다보면, 노을이 들어와 눈이 부셨다가 어느새 밤이 되어버린다. ‘시간이 이렇게 가는구나, 하루를 또 수술실 간호사로 채웠구나.’



수술실은 멸균 영역 유지와 감염 관리 때문에, 온 습도를 일정 기준에 맞게 항상 유지하고 감염 관리 기준에 맞게 공기흐름 장치를 켜놓는다. 그래서 건물 외부 요인으로부터 최소한의 영향을 받는 안전한 구조로 조성하게 된다. 화재 시 연기를 내보내기 위한 배연창 외에는 창이 없어, 바깥의 계절과 풍경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별 것 아닌 낙이지만, 방화창이 보이는 수술방 밖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순간 순간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눈이 많이 나리던 날, 여름 태풍이 불던 날, 황사가 끼어 동네가 뿌옇던 날, 녹음과 낙엽으로 산이 옷을 갈아 입던 날들... 분주하게 보내던 순간, 감정의 소용돌이가 바깥 풍경을 보는 순간 누그러진다. 누군가를 살리고 또 살린 누군가가 우리를 먹여살리는 일상. 생과 사가 오가는 병원의 분주함과 무관하게 창 밖의 계절 풍경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



살기 위해 온 사람들, 죽음을 시도했다가 혹은 죽음에 가까워졌다가 생의 길로 인도된 사람들. 태어나는 생명, 피 흘리며 죽어가는 생명. 어느 순간이든, 어느 생명이든 살아있는 존재에게 삶은 지속된다. 그 어떤 고통과 고난도 생을 향한 의지를 그만두게 할 수 없다. 창 밖의 무심한 자연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또 소생시켜 흘려 보내듯이, 그저 그렇게.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고민해본다. 새로운 생각도 과거의 누군가가 했을 생각이고, 반복되는 자기 위안과 자책의 감정도 수많은 세대를 거쳐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야기 나누고 싶고, 이해받고 싶은 욕구는 시대를 막론하고 지속되어 왔다. 여러 플랫폼을 통해 개인의 일상과 직업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느 때보다 자신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고 인정받고 소통할 기회가 열려 있다. 여기서 내가 경험한 이야기의 가치는 어디로 가게 될까. 



나이가 들면, ‘내가 선택하고 나아가고 있는 20대의 기억’은 언젠가 문득 그리울 시간이리라. 미래의 나를 위해, 낯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던 생각들을 담아냈다.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생각과 언어의 경계가 점점 더 넓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구술하고 기록한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의 삶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고조곤히 이야기하며 진심을 주고받는 순간을 좋아한다.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에 시선을 기울여줘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기쁘고 행복합니다.



수선생님이랑 수시 면담을 진행하면서, 연차에 대한 역할 수행과 직무 지식 기대를 받고 있는 중간 연차임을 실감했다. 수술실이라는 특수 부서에 일하기 때문에 10년, 20년이 넘는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지만 그만큼 고연차 사이의 인력 공백 또한 크다. 승진할 수 있는 자리는 정해져 있으나 그 자리의 선생님들은 수술팀 내에서 로테이션을 하니 새로운 자리는 나지 않고, 연차가 높아도 계속된 진료과 별 로테이션으로 방장은 차치하고 트레이닝을 위해 액팅을 해야하는 상황도 종종 생긴다. 



5년 이상을 중간 연차라고 하더라도 출산으로, 육아 휴직으로 그만두시는 분들도 있고 3년에서 5년 정도의 경력을 채우고 공공기관, 의료기 업체 등으로 이직하시는 분들도 있다. 대다수 간호사의 부서가 그러하듯, 경력 간호사가 귀하고 특히 신규 간호사가 많은 시기도 있었다. 그 해에 사직자가 많아 신규 간호사만 30여 명이 들어온 해도 있었으니 말이다.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선임 선생님들이 나에 대해 가질 연차에 대한 기대가 부담스럽다. 시간이 쌓이는 동안 크고 작은 경험들도 많이 할 수 있었다. 소속 과의 수술방이 확장되면서, 동기들 중에서도 이른 시기인 3년차부터 방장 역할을 맡았다. 연차가 많은 다른 선생님들처럼 6개월에서 1년까지 정해진 기간으로 방장을 맡지는 못하고 짧게 지속했지만, 필요에 따라 소속 과의 방을 돌아다니며 세 방의 방장을 해보았다.



갓 독립한 신규 선생님과 함께 일하면서 배움의 속도와 한계, 태움과 역태움 사이에서 스스로를 경계하기도 하고, 나보다 연차 높은 선생님들과 방장으로 일하며 수술 관련한 인계를 전하고 경험을 나누면서 사회 생활에 관한 피드백도 많이 들었다. 여러 과의 수술이 돌아가면서 배정되어 매일 매일이 무척 바쁜 시기도 있었고, 같은 과의 루틴한 수술을 지속하면서 안온한 평화에 취한 적도 있었다. 기구며 셋팅에 굉장히 까다롭고 어시스트에게 공격적인 교수님과 함께 일하기도 하고,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의 역량으로 수술을 최상의 결과로 이끌어가는 교수님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프리셉터 입문 과정을 수료하고, 상급종합병원 인증평가를 위해 공부하고 환경을 정비했다. 과의 SOP를 수정하기도 했으며, 수술방의 액팅과 방장 인계를 위해 방의 인계 자료를 주도적으로 제작하고 피드백을 받기도 했다. 창의학습활동을 통해 타과 선생님들과 협동 활동도 해보고, 수술간호사회 학회지를 훑어보며 동종 업계의 주요 관심사와 현황, 발전 방향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타병원에서 진행한 이비인후과 수술학회에도 참석해보고, 업체 본사에서 진행한 트레이닝 프로그램에 참석하기도 했다.



진료과 회식 자리에 참석해 친목을 도모하고 그간의 회포를 풀기도 하고, 등산을 동반한 야유회에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기도 했다. 사직과 이직, 결혼과 출산으로 수많은 선생님을 떠나보냈고, 새로운 선생님들을 꾸준히 마주하며 함께 일해왔다. 각종 주말 근무는 물론이고 나이트와 명절 근무도 하고, 잘 아는 수술과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수술의 스크럽을 하면서 훈련되어 왔다. 새로운 기구와 장비, 수술 재료의 사용법을 배우고 소독간호사와 순회간호사로 '더 잘 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계속해서 트레이닝 받았다. 꾸준히 기억력의 한계에 부딪치고, 표정과 행동으로 오해를 사고, 나와 타인의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고,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가 되기 위해 역량을 키웠다. 심장이 뛰고 손이 떨리는 수많은 순간이 있었고, 예측하지 못한 응급 상황들에 우왕좌왕 하면서도 나름의 최선을 다해 행동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한계를 안다. 안온하게, 기존의 노력으로 무사히 보내었던 시간들을 안다. 수술을 타는지 안 타는지, 함께 일한 그 시간들에 얼마나 배울 수 있었는지, 그 경험의 폭은 개인별로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공통적인 기대로 누군가는 나에게 연차를 운운하고, 누군가는 경험을 운운할 때 '해보지 못해서, 배우지 못해서, 알지 못해서'의 핑계는 더이상 통하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전체적인 고생과 일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차라리 일찍 매를 맞는게 나을지 모른다. 어릴 때는 어리다는 이유로 배우기도 쉽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어도 이해받기도 하니까.



수술실 간호사는 일을 하면 할 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에 대해서 더 잘 깨달을 수 밖에 없다. 책임감과 무게, 열정과 성실성을 가지고 노력하더라도 일은 그것만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센스, 지능, 순발력, 대인관계 능력, 적응력, 대처 능력 등 어느 부분에서는 부족하기 십상이다. 무사하지 못한 날을 보내고 지쳐있을 때, 나는 스스로를 세상에서 제일 미워한다. 다른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더라도 내가 못난 모습은 내게 가장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렇게 침잠할 수는 없는 노릇. 나에게 조금의 숨 돌릴 틈을 준다면, 길게 한숨 푹 쉬고 맛있는 것 먹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리라. 실수했던 부분을 잊지 않고, 나와 주변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해주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리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이런 고민도 고통도 없을 거니까. 나를 가볍게 대해주지만 다시 무게를 찾을 수 있게, 마음을 위로와 용기로 가득 채워주리라. 그렇게 일을 지속하고, 인생의 크고 작은 역경과 마주하다보면 돌이켜 보았을 때 '조금은 잘 살았다' '나는 나의 최선을 다 했구나' '내 몫의 경험을 충분히 했다'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과 성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의 가장 큰 울타리고, 가장 큰 팬이다. 그 모든 경험을 긍정해줄 수 있는 것,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일의 의미가 희미해지고 지치고 소진되는 나날만 계속될 때의 우리를 위해 미리 위로를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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