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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K Oct 21. 2023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것인지


지금 트레이닝받는 방에선, 주중 하루 외과 간담췌 교수님 배정이 있다. GS HBP 파트는 아무래도 혈관도 많고 혈류가 풍부한 간을 다루기에 CUSA, ARGON, SONO 등 특수 장비도 쓰고 응급 상황도 잦다보니 이브닝 때에도 타과가 순회간호사를 갈 일이 거의 없어 간접 경험도 없다. 정식으로 외과 트레이닝을 받은 것도 아니라 절대적인 지식과 경험도 부족한데, 수술 트레이닝을 위한 건수 자체가 드물어 익히기도 힘든 수술을 하려니 정말 어렵고 괴롭다.


배를 여는 개복수술을 다루어 본다고 하더라도, 복강경 수술을 매일같이 하더라도 외과 파트에 따라, 교수에 따라 수술 공부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교수는 12MM TROCAR를 쓰면서 3/0 ND의 실 끝을 ENDO NH에 물어달라고 하고, 어떤 교수는 더 작은 8MM TROCAR를 쓰면서도 3/0 ND의 니들을 ENDO NH에 물려달라고 한다. vessel suture하는 micro NH나 vein NH는 핸들링도 서툰데, 더블 암으로 니들을 쓸 때는 스크럽이 어떻게 어시스트를 해야 하는지도 여러 과랑 수술을 해가면서 배우고 있다. 교수님이 실을 뜨고 펠로우가 타이할 때 손에 물 뿌려주는 것도 첫 번째 tie할 때만 뿌리라든지, 손에 물 뿌리는 것도 IR syringe를 18G 니들 구부려 만드는지(이것도 과마다 한 번 구부리는지, 두 번 구부리는지 다르고), angio NH 탐침만 빼 쓰는지, 스포이드로 직접 뿌린다든지, 어시스트가 하는지 스크럽이 하는지 따위의 것들...


이런 것들은 수술 프로시져에 있거나 과별 인계사항으로 정리하거나 일일이 구전으로 인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잘하고 많은, 그 과의 '상식'같은 것이다. 수술을 하면서 알게 되고 익히는 그 진료과 팀의 공공연한 규칙이고, 그 파트를 트레이닝 받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알며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은 공통점과 차이점 사이에서 길을 헤매는 약속들. 이런 특이사항이 많은 파트일수록 미리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하고 인계해주기는 사실상 불가능한지라 스크럽은 눈치밥 먹기가 서럽기 그지없다.


복강경 좌간엽 절제술을 처음 해보는 날, CUSA 조립 자체를 처음하며 상을 차렸는데 갑자기 마취하는 중에 교수님이 개복술로 전환하자고 한다. 개복 가능성이 미리 예고된 것도 아니었기에 필요한 수술재료, 기구, 봉합기 등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고, 개복 수술 프로시져는 혹시나 해서 복강경 공부하며 같이 본 대략적인 공부가 지식의 다였는데.. ㅠㅠ 방장 선생님은 외과 구역으로 필요한 것들을 가지러 뛰어가고, 의사와 전담간호사는 마취 다 되었으니 손 씻고 들어와서 수술 가운을 입겠다는데 가우닝 해 줄 사람도 없어서 상 차리다가 나왔다. 마침 식사 교대해주던 다른 간호사가 잠깐 와줘서 상 차리는 걸 도와주며 해줬으니 망정이지, 속으로는 정말 눈물날 뻔했다. 간 수술은 하루 종일 상 차린다고 할 정도로 기구도 많이 나오고, 특수 장비 셋팅도 해야되고, 응급에 바로 대처하게 미리 대비해두는 것도 많지 않은가.


의사가 배를 여는 동안 거즈 카운트만 먼저 시작하고 상을 다시 차리면서 추가로 필요한 기구들 받아 정리하며 카운트하고, 쓸 수 있게 셋팅하고, 타이 실이며 부츠며 부속 기구들이며 수없이 상으로 손이 오가면서 겨우 수술상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나는 리버 개복 상차림은 자신이 없어서 뒤로 물러나고(저번 주에 손 바꿔서 메인 중간부터 한 번 스크럽 해봤으니, 상차림이 어설프고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도와주러 온 다른 간호사가 메인으로 도와줘서 겨우겨우.


말 귀 잘 못 알아듣는 스크럽이 답답할 법도 한데, 교수님도 '좀 많이 봐주고 기다려주시는' 티가 나서 나는 죄인처럼 수술을 했다. 교수님이랑 펠로우는 괜찮았는데,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반말을 하던 전담간호사 선생님이 '이것도 안 해주냐'는 틱틱한 말투로 이것저것 챙기라할 때는 억울하면서도 서럽더라. 억울하다는 감정이 정확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계 사항에도 없고 구두 인계를 받은 적도 없으며 본 적도 없는 상황들이 있었다. (간접 경험이라도 했으면, 몰랐던 부분을 깨닫고 선생님께 물어봐서 학습했을 테니까) 방장 선생님도 순회간호사 업무하랴 기록 쓰느랴 바쁘셔서 못 봐주는 상황이니 혼자 어떻게든 해보려고 이때까지의 스크럽 경험을 종합하여 유추해서 하고 있는 건데, 이 과만의 스타일들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것인지 현타가 온 것이다.


'못 하겠어요'라고 말하기에는, 선생님도 내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스크럽을 넣으신 거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큰 수술일수록 바깥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적시에 필요한 조언이나 부속 기구, 수술 재료를 내주는 순회간호사의 역량이 더 필요하기에 방장 선생님이 순회간호사를 하시는 게 더 낫기도 했다. 그래서 어찌어찌, 간 수술 복강경 상차림과 쿠사 조립도 처음 해본 날에, 타인의 도움으로 차려진 개복술 상차림에 수술을 겨우 끝까지 해야했다.


이렇게 알게 될 예정이었던 걸까. 복강경 수술 예정임에도 개복 수술 공부를 같이 하기는 했지만, 미흡했던 학습 태도도 반성했고. 부족한 경험 탓에 눈치를 받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가 더 눈치보며 위축한 것도 힘들었고. 바로 개복 전환할 때 필요한 것들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타이 실과 수처 실에 대한 암기가 안 되어있던 것을 깨달았고. 인계 파일에 있는 것 이상으로 다른 쓰임은 없는지, 내가 알고 있는 용도가 맞는지 적극적인 호기심을 가지지 않았던 자신을 탓했다. 부족함을 먼저 인지하고 늘 배워나가는 겸손 만이 전부가 아닌, 동료로서 함께 일하기에 힘들지 않은 '업무 능력'에 대해 많이 인지하고 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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