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내가 입사를 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JS가 입사를 했다. 으레 새로운 디자이너가 들어오게 되면 이 사람의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 나름이다. 개인 포트폴리오를 찾아보거나( 게임회사 아티스트들이 포트폴리오나 자신의 이력서를 올려놓을 곳은 뻔하기 때문에) 하면서 탐색 전을 하고는 한다. 제이는 나와 책상 짝꿍이었다. 입사 한 이후 그가 다른 팀으로 가기 전까지 우리는 내내 책상 짝꿍이었다. 대체로 어린 나이의 팀원들 사이에 제이와 나는 어느 정도 연배가 같아 비교적 말이 잘 통했다.
그는 게임 엔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오랜 경력자답게 일 처리가 능숙했다. 보드게임을 굉장히 좋아했고 일을 하다 쉬는 시간에는 밖에 나가 늘 전자담배를 피우다 들어왔다. 금연의 중간단계로 전자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이었는데 내가 퇴사를 하는 날까지 그가 금연에 성공한 모습은 보지 못했다.
친해지고 난 후엔 그는 나를 'crazy'라고 자주 불러 이며 나는 그를 '이상한 놈(weirdo)'이라고 불렀다. 가끔 잘난 척을 하고 짓궂게 굴었지만 일 적인 부분에서 나를 많이 도와주었고, 힘들 때 이야기를 들어주던 좋은 사람이었다.
빡빡한 스케줄을 좀처럼 따라잡기 힘들어하던 어느 날이었다.
[나만 이렇게 스케줄 따라잡기 힘든 건가?]
나의 말에 JS가 그의 콧 등에 걸려 있는 검은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올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더 필요하면 이안에게 말하면 되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그를 보며,
[그럴 순 없지. 너희들은 다 제시간에 척척 끝내는데 나만 시간을 더 달라고 할 수 없잖아.]
[스케줄은 이안이 정한 거지 네가 정한 게 아니잖아. 너는 네가 하는 속도가 있는데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이야기를 해서 조정하는 게 맞지.]
여유롭게 응대하는 그의 모습이 은근히 얄미웠다.
그렇지. 말이야 구구절절 맞는 말이지만 너야 제시간에 딱딱 끝내니까 그럴 수 있는 거지. 나는 차마 시간을 더 달라고 그 비슷한 말이라도 꺼낼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을 잃을 것만 같았다. 당시 나는 누가 봐도 내 몫을 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이든 아니든 일단 그 근처 에라도 가야 제 때 끝내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업무시간에 다 끝내지 못하면 출근을 일찍 해서라도 끝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다음 날부터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경력도 오래되고 게다가 나의 작업 스타일은 프로젝트와 정확히 맞아떨어져 나는 흔히 입사 전 하는 실무 테스트도 하지 않고 A 회사에 들어왔다. 그래서일까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혔던 것 같다. 일에 적응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모습도, 그로 인해 남아서 일을 해야 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래도 이 바닥에서 밥벌이 한 시간이 얼만데……. 하지만 다른 팀원들도 속속 들어와 자리를 채우며 팀이 구색을 갖춰가는 이 마당에 이제는 허세 따위 멈추고 현실을 직시해야 할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아침에 출근을 일찍 하며 일을 일찍 시작했고 종종 퇴근하고 집에 일을 가져오기도 했다. 절박한 마음으로 작업에 매달렸다. 프로젝트에 쓰이는 게임 엔진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 퇴근 후 몇 달 동안 관련 영상을 찾아보며 씨름했다. 다행히 하나둘씩 일을 제때 맞춰 끝내기 시작했고 실수도 줄어들었다. 제 때 일이 끝나기 시작하면서 바닥에 붙어 다니던 자존감도 힘을 얻었고 일은 여전히 바빴으나 조금씩 마음의 여유도 생기기 시작했다.
[ 갑자기 초능력이라도 생긴 거야 뭐야. 요즘 결과물도 좋고 스케줄도 잘 맞추고, 일에 잘 적응해 나가는 것 같아 너무 기쁘네요.]
이안이 내 스케줄을 체크하며 특유의 과한 몸동작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정말 고마워요. ]
이게 정말 그가 나에게 하는 말인가? 처음 나의 작업에 대해 이안이 칭찬을 했다. 진심으로 그의 칭찬이 고맙게 느껴졌다. 그의 단비 같은 칭찬 이후로 나의 직장생활은 바뀌기 시작했다. 업무 시간 사이사이 새롭게 합류한 사람들과도 조금씩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팀원들과의 소소한 대화에서 이안의 압박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안이 무서워.]
대화 도중 나의 고백에,
[사실 나도 그래. 내가 일 하나를 끝내서 이안에게 보고 하고 돌아서면 그는 이미 내 등 뒤에서 테스트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
프로그래머로 나보다 일찍 입사한 매튜가 맞장구를 쳤다.
매튜의 말이 끝나고 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는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스케줄 맞추기가 너무 힘들어서 아침에 일찍 와서 가끔씩 집에 가서 일을 해야 했어. 잘리기 싫었거든.]
[와우…. ]
나와 매튜와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JS는,
[나도 집에 가서 해 왔는데.]
[뭐라고?]
[나도 집에 가서 해 왔다고. 스케줄 맞추려고.]
나는 잠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 얄미운 녀석에게 쓸 수 있는 영어 단어가 뭐가 있었더라?
[왜 말 안 했어?]
[뭘?]
[내가 스케줄 때문에 너랑 몇 번을 얘기했는데 왜 말을 안 해줬냐 이 말이지.]
[그걸 뭘 말해. 그리고 네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
그의 말대로 굳이 말해 주어야 할 필요도 의무도 없었지만 적어도 본인 역시 그 문제에 있어 쉽지는 않아 노력을 하고 있다고는 말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나는 그랬을 것 같았다.
대개 회사를 들어가면 3개월가량의 수습 기간이 주어진다. 회사도 고용인도 여기서 계속 함께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이때 가늠해 본다. 때문에 고용인의 입장에선 3개월은 중요하고 긴장되는 기간이다. 그때 본인의 능력에 대해 잘 어필을 해 놔야 회사와 일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JS는 아닌 척, 태연한 척을 했지만 사실은 나 못지않게 압박을 느끼고 있었고 일 잘하고 능력 있는 직원이 될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마치 물 위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유유히 헤엄을 칠 때 물아래에선 쉼 없이 필사적으로 다리를 젓고 있는 한 마리의 수컷 백조처럼.
더 이상 그 주제에 대해 우리는 대화를 이어가진 않았고 커피를 마저 마시고 각자 자리에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그 날 오후 이안은 단체 채팅 창에 일이 잘 진행되어 기쁘고, 모두들 자기 하는 일에 아무 문제없이 적응해 가는 것 같아 아주 만족스럽다는 메시지를 팀원들에게 전달했다. 한껏 들뜬 듯 보이는 그의 응원 메시지가 끝나고 나는 왜 그런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채팅창을 열어,
[이안, 프로젝트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기분이 좋네요. 그런데 저는 요즘 아침에 일찍 나와서 그리고 가끔 저녁에도 늦게까지 일을 해요. 스케줄이 좀 타이트하기 때문이에요. 그렇지만 다른 팀원들도 불만 없이 잘해 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본 이안은 내 자리로 서둘러 오더니 오른쪽 옆에 쭈그려 앉아 자리를 잡고,
[ 그런 줄 몰랐어요. 팀을 위해 프로젝트를 위해 그렇게 노력을 해 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혹시라도 일 하는 데 불편한 점이 있다면 주저 말고 얘기해 주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왜 그때 그런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하지만 꼭 하고 싶었던 말이라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키보드를 쳤던 건 기억에 남는다. 확실한 건 그 날 이후로 더 이상 회사에서 잘릴 것 같다는 불안감에 움츠려 들지는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