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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멀더와 스컬리 Jan 21. 2024

아이처럼 날씨를 느끼고 싶다

남매일기/열살/딸/열네살/아들/일상/어록

개학을 앞둔 딸아이가 바빠졌다. 휴일 아침부터 아이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사각사각 일기를 써 내려갔다. 옆에서 일기를 훔쳐보다가 나는 아이의 날씨표현에 시선을 멈췄다. 맑음, 흐림, 눈, 비, 바람, 보통 몰아 쓰는 일기의 날씨는 이런 식이 아니었나? 어린 시절의 나는, 미뤄뒀던 일기를 몰아썼다는 것을 선생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 일기예보를 뒤적거려 눈비가 왔던 날을 체크하곤 했었다. 하지만 아이의 접근방식은 나와는 조금 달랐다. 

엄마 : "몰아 쓰는 일기인데 어떻게 날씨를 다 알아?"


아이 : "그냥 그날의 느낌이 다 기억나요"


아이는 있었던 일을 떠올려서 주제를 정하고, 그날의 느낌을 떠올려 날씨를 적는다고 했다. 몰아 쓰는 일기지만 참으로 정성스럽다. 아이의 날씨를 기록해주고 싶다. 



- 덥기도 하고 춥기도 한 날 

- 주룩주룩 비가 오는 날

- 해가 쨍쨍한 날

- 투두두둑 비가 오는 날

- 쨍쨍 해가 밝은 날

- 비가 살짝 오는 날

- 밝지만 추운 날

- 해도 쨍쨍하고 바람이 부는 날

- 바람이 선선한 날

- 아침에는 춥고 저녁에는 따뜻한 날

- 쌩쌩 비바람이 부는 날

- 비가 살살 오는 날

- 쌩쌩 바람이 많이 불고 몸이 꽁꽁 얼 것처럼 추운 날

- 두근두근 첫눈이 오는 날

- 몽글몽글 구름이 하늘을 가린 날

- 햇볕이 쨍쨍하지만 추운 날

- 해가 구름에 가려진 날 

- 해와 다르게 날씨는 추운 날

- 영하에서 영상으로 오른 날

- 오랜만에 눈이 펄펄

- 화이트 크리스마스

- 겨울인데 해가 쨍쨍?!

- 바람과 햇살이 같이 있는 날

- 바람은 쌀쌀, 햇빛은 쨍쨍

- 어두컴컴한 날

- 해가 봄처럼 쨍쨍

- 새해 첫날이라 그런지 해가 쨍쨍

- 어제와 다르게 밝지 않은 날

- 의외로 하늘이 흐릿흐릿 


이렇게 다양한 날들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모두 다른 날들인데 나의 날들은 너무 단순해졌다. 우산을 챙기거나 아니거나, 외투가 두껍거나 아니거나, 출근을 하거나 안 하는, 그날이 그날이고 그날이 그날이다. 나이가 들면서 급하고 중요한 것들만 쫓다 보니 삶이 너무 지루하고 시시해졌다. 


아이처럼 날씨를 느끼고 싶다. 바쁘다는 핑계로 귀찮다는 이유로 일기까지는 쓰지 못하지만, 그날의 날씨만 제대로 느끼고 기록해도 지금보다는 색다른 하루들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아이의 날씨를 보며 내 삶을 돌아보게 되는 하루다. 


오늘도 고마워. 똥꿍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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