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싣고 온 발걸음
첫날 댐을 보고 와서, 둘째 날 열차 출발시간까지는 시내를 도보로 돌아다니는 것. 계획은 그랬다. 하지만 이것이 정확하게 시간계획이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즉흥적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은지라, 정보를 수집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저 댐이라는 곳이 이르쿠츠크처럼 시내에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고, 댐까지 얼마가 걸리는지, 그 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그 주변에서 1박을 하게 될 수도 있어 빨리 댐으로 움직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여행 계획을 되짚어 보자니, 시내 관광을 할 때는 또 어떻게 할까가 고민되었다. 일반적으로 시내 관광이라고 하면, 그 도시의 명소를 둘러보는 것이 가장 우선일 것이다. 검색은 해봤다. 여름에는 특히 아름답다는 예니세이강도 있었고,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정교회 첨탑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모두, 겨울에는 다니기가 힘든 곳에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앞서 말한 대로, 정확하게 이것들이 어디에 있고, 어떤 방식으로 가야되는지도 모르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래서 일단, 기차역에서 관광지도를 사기로 했다. 돌아다닐 동선은 지도로 파악하기로 하고, 모르는 버스 노선은 물어서 다니기로 하고서는.
12시 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차는 크라스나야르스크 역에 도착하였다.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열차는 선로 위로 밤새 쌓인 눈에 미끄러지듯 역에 도착했다. 창 밖을 보니, 마치 호텔인 듯한 빌딩이 플랫폼 바깥에 서 있었다. 긴가민가 하면서 열차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나서야, 이것이 크라스나야르스크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보다 역사의 크기가 큰 것에, 솔찮이 기대심이 들었다.
짐을 챙겨서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생각보다 내리는 손님들은 많지 않았다. 사람보다도 눈이 더 많이 쌓여 있었다. 역무원들은 사람 없는 바닥을 계속해서 쓸어나가고 있었고, 그렇게 많이 밟지 않아서 그런지 치우는 것이 그닥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끝없이 내리는 눈과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군대에 있을 때가 생각났다. 아직도 내리는 저 하얀 가루들과, 시꺼먼 구름을 보았을 때 작업이 빨리 끝나기를 기대하는 건 참으로 힘들어 보였다.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승객용 출구로 빠져나갔다.
버스를 기다리며, 광장 로타리에서 버스가 빠져 나오는 길에는 레닌과 그의 추종자들을 그려 놓은 것으로 보이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사 외관에서부터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이 곳 크라스나야르스크 역 앞의 풍경은 흔히들 말하는 ‘러시아스러운’ 풍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낫과 망치가 그려진 빨간 깃발이 펄럭일 것 같은, 차가운 벽돌로 지어진 공산주의식 풍경.
물론 이르쿠츠크 역시, 공산주의 시절에 지어진 회색 건물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하지만 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건물들은 판이하게 다르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귀양온 귀족들의 영향으로, 이르쿠츠크의 길거리는 19세기 유럽의 모습을 담고 있다. 기둥도 둥글둥글하게 세워 올리고, 색채도 아기자기하게 입힌.
그래서 생경했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기후와 민족들로 분별된 이국적인 풍경은 당연히 존재한다. 러시아같이 큰,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라면 더욱 그럴 터였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5년동안 눈에 각인된 풍경은 러시아의 보편적인 이미지를 이르쿠츠크로 덧씌워 놓고 있었다.
지도에서 보니 크라스나야르스크 댐까지는 대략 시내에서 2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댐까지 가는 시내버스는 없고 따로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지브노고르스크라는 마을까지 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곳은 이르쿠츠크보다 더 북쪽. 해는 더욱 빨리 진다. 지체할 시간 없이 터미널까지 가는 버스를 잡아 탔다. 버스는 승객을 모두 태우자마자 남쪽으로 달렸고, 그 때 짧게나마 예니세이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돌아온 다음 내일 다시 천천히 구경해주리라 마음먹고서는, 버스에서 나오는 안내 음성에 집중하였다. 혹여라도 내릴 곳을 놓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