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여기는 전라남도 구례
8년 만에 다시 찾아온 지리산 자락
20대 때 혼자 배낭 하나 메고 여기저기 다녔던 곳들 중에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여행이 있다.
박경리의 <토지>의 주무대인 지리산과 섬진강을 보러 간 2013년 여름의 구례-하동 도보 여행.
100% 도보로 완주하지는 못했지만
7월 뙤약볕 아래 온몸으로 부딪혔던 것들, 깨달았던 생각들이
나의 20대 후반을 단단하게 받쳐주었다.
그래서 꼭, 다시 오고 싶었던 곳이다.
2013년은 방송작가를 시작하기 직전, 사회에서의 역할이 주어지지 않아 괴로울 때였다.
디자인대를 도망치듯 졸업해버리고
외국에 나가 살겠다며 한국어교육학을 추가로 전공하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딱히 미래가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애타게 나의 길을 찾고 있었고, 보는 세계가 그렇게 넓지 않았던 터라 특히나 애를 먹었었다.
(월급쟁이 사무직 회사원, 프리랜서 딱 2가지로만 세상을 인식했다.)
아무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면 글을 쓰는 일이었고,
사진이나 영상 찍는 일도 너무 좋았다.
그런데 이 일들을 합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던 거지.
그즈음 박경리의 <토지>를 다시 읽고 있었고
일제 강점기의 1분 1초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인물들과
그들이 숨어 살았던 지리산 자락, 기대 살았던 섬진강과 사랑에 빠졌다.
수십 년이 지나, 그 시절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어도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지리산과 섬진강.
토지의 인물들이 느꼈던 마음을 그대로 느끼고 싶어서,
그들처럼 똑같이 나도 걷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현재 내 정체성을 이루고 있는 가장 큰 뼈대는 그때 만들어졌다.
1. 사방에서 나를 공격하고 더이상 길이 없다고 느껴져도, 빠져나가는 방법은 앞으로 가는 길 밖에 없다는 것.
2. 그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순간 뒤에는 반드시,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인 하늘이 펼쳐진다는 것.
3. 안정을 포기하고 두려움과 직면하면 반드시 얻게 되는 것이 있다는 것.
방송 일이 너무 힘들어서 다 포기하고 싶을 때면
2013년 구례-하동 도보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면 버틸 수 있었고,
그래서 한 걸음씩 걸어갈 수 있었다.
가보지 않은 길이 두려워서 망설이는 때에도
2013년 구례-하동 도보 여행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러면 얼마든지 힘이 났다.
꼬박 8년 만에 다시 마주한 구례.
나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선으로 걸어 또 한 번 비슷한 지점에 와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