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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풀 Mar 27. 2022

[그가 사준 맥주는 따스했다]

1996년 여름, 어느 짧은 휴가

맥주(麥酒) ‘보리로 만든 입니다.

보리를 싹 틔워 만든 맥아(麥芽: 보리 맥, 싹 아/malt/엿기름)로 즙을 만들어 여과한 후, 쌉싸래한 맛을 내는 홉(hop)을 첨가해 발효시킵니다.

여기서 ‘엿기름’은 엿으로 만든 기름[oil made of taffy(sugar)]이 아니라, 보리싹을 엿으로 기른 물질을 뜻합니다.


맥주의 영어단어 ‘beer’의 어원으로는, 마시다란 뜻의 라틴어 ‘비베레(bibere)’와 곡물을 의미하는 게르만어 ‘베오레(biore)’가 있습니다.



[그가 사준 맥주는 따스했다]


1996년 여름, 대한민국 육군 신대두 일병의 삶은 찌글찌글했습니다.


입대한 지 이제 열 달, 제대일은 까마득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군번도 꼬일 대로 꼬였습니다.

스무 명 남짓 규모 부대에서 선임병만 열댓 명...

후임병이 다섯 있었지만, 그 중 셋이 중대 행정병에 연대장 수발드는 당번병과 관사병이었습니다.

정원 머릿수만 차지하고 일반업무를 분담할 수 없는 얄궂은 운명이었습니다.


나머지 둘은 페이션트 솔져들.

한 분은 ‘침샘 이상’이란 질환으로, 국군수도통합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다른 한 분은 ‘추간판 탈출증’(척추 디스크)으로 병원에 요양 갔다가, 이내 수술을 받곤 국군에서 탈출했습니다.


몸이 멀쩡한 후임병이 있었지만, 막 이등병을 벗어나 일머리가 아직 많이 아쉬웠습니다.

나는 실질적 막내였습니다.


그런 짜증나는 군생활을 견디는 데 힘이 돼준 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정기 외박’이었습니다.

불과 48시간짜리 초단기 휴가였지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집에 가서 시원한 맥주 한 잔에 한숨 늘어지게 자고 오는 것만으로도, 너끈히 두 달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96년 8월, 고대하던 정기 외박일이 왔습니다.

극성스런 폭염에 태양마저 더위먹었던 금요일, 10kg이 넘는 무전기를 짊어지고 영외 훈련장으로 향합니다.

말이 좋아 중대 무전병이지, 그냥 서열 낮은 짐꾼일 뿐입니다.

온종일 땀이 비 내리듯 흐릅니다.

게다가 얼마 전 보호 마스크 없이 탄피회수기 용접을 하다가 화상을 입어, 얼굴에 허물이 벗겨지고 눈도 쓰렸습니다.

그래도 몇 시간만 버티면 휴가를 나간다는 생각에, 남몰래 ‘씨~익’ 웃으며 버텨냈습니다.


그날따라 훈련이 더뎌졌습니다.

지친 태양이 산 넘어 쉬러 갈 무렵, 정기와박자들 먼저 부대에 복귀해 휴가길에 올랐습니다.

설렘, 환희, 기쁨...

그저 행복했습니다.

2박3일이 지나면 다시 찌글찌글한 쫄따구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좋은 건 좋은 겁니다!


정기외박일행 중에는 임 병장도 있었습니다.

이등병 때부터 잘 보살펴줬던 옆 중대 선임이었습니다.

가끔 지나칠 때면 초코파이나 핫브레이크를 건네주었습니다.

영내에 풍진이 창궐해 의무실에 입실했던 밤, 군기 빠져 병 걸렸다고 산사태 같은 욕에 쓸려가던 나를 데려가, 몰래 사발면을 나눠주던 모습도 따스했습니다.

그래서 은근히 임 병장과 마주치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음 속 버팀목이 돼준 선임병이었기에, 항상 고맙게 여겼습니다.

그런 이와 함께 휴가를 나가게 돼, 더욱 흥겨웠습니다.


위병소 앞에서 같이 담배를 피우다가, 임 병장이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담에 술 한 잔 사줄게. 형네 집이 부산이잖아.”


짧은 휴가인 데다가 집도 각각 서울과 부산이었습니다.

군팔(군용 88 담배) 한 대에 거수경례가 휴가 세레모니의 전부였습니다.


“잘 다녀오십시오, 충~성!”


“형이 술 한 번 꼬~옥 사줄게, 정말 미안타~”


임 병장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미안하단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돌아서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보일 듯 했습니다.


밤 10시, 서울에 도착해 간만에 편한 잠에 빠졌습니다.

온갖 피로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포근한 이불에 몸을 맡겼습니다.


지하 호프집, 휴가 나온 일행끼리 맥주잔을 부딪칩니다.

맥주 맛이 유난히 짜릿합니다.

그런데 임 병장의 표정이 좀 어둡습니다.


“신대두, 형 없어도 군 생활 잘 하고 항상 건강해야 된다...”


“에이, 임 병장님~ 제대 얼만 안 남았다고 일병 나부랭이 약올리십니까? 술값이나 내십쇼!”


술이 제법 올라 일병이 감히 병장에게 까붑니다.


“술은 형이 산다... 걱정 말고 마셔라...”


임 병장이 조금 달라 보입니다.

탄력 있던 구릿빛 얼굴이 유난히 창백하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왁자지껄 즐겁게 술을 마셨습니다.


“자, 잘 마셨습니다. 2차로 소주 어떻습니까~?”


모두들 흥겨워 일어나는데, 임 병장만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먼저들 나가라...”


“아아... 상진이 형, 빨리 나와아~!”


밀려오는 갈증에 잠에서 깹니다.

시간은 새벽 1시 30분, 한여름밤의 호프집 꿈이었습니다.

조금 더 푹 자고 일어나서 하루를 실컷 놀고도, 하룻밤을 더 잘 수 있습니다.

다시 안도의 잠자리에 듭니다.

하지만 휴가는 총구를 박차고 나간 탄환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군 생활이 그만큼 줄었다는 얘기도 되지만, 다시 고된 일상이 기다리는 쫄따구의 복귀길은 두려움 반, 짜증 반입니다.


해질녘 부대밖까지 풍겨오는 잔반 냄새는, 처진 어깨를 더욱 짓누릅니다.


“휴가 복귀했습니다, 충성!!!”


그런데 부대 분위기가 좀 이상합니다.

선임들 얼굴에 긴장감이 맴돕니다.


“너 왜 P77(배낭형 대형무전기) 교장에 그냥 놓고 갔어!”


아랫사람 갈구는 게 기쁨인 전 상병이, 오자마자 신경질을 냅니다.


“교보재(교육보조재료) 옆에 있어서 챙길 줄 알았습니다.”


“니가 남이 챙겨주는 거 받아먹을 짬밥이야!”


젠장... 하나 있던 후임병께서 무전기를 챙기지 않았답니다.

그 큰 기계장치가 안 보였다는 게 어이가 없었지만, 무전기는 내 담당이었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너 이 새끼, 내일부터 군기교육이야. 훈련복이랑 식판 챙겨!”


하아~ 돌아오자마자 무슨 날벼락인지...


“따라와....”


바로 윗 선임 일병이 나를 부릅니다.


“상황이 안 좋다, 너랑 같이 휴가 나간 선임 중 하나가 안 돌아온다.”


“네? 누가 탈영이라도...?”


“아니, 영원히 복귀 못 해... 죽었다.”


순간 머릿속에 임 병장이 떠오릅니다.

12명 휴가자 중 임 병장, 유독 임 병장만 생각납니다.


“임 병장님 얘기하시는 겁니까?”


“누가 벌써 얘기해줬구나...”


임 병장은 부산 가는 기차에서 떨어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해 나이 스물 둘.

나와 동갑이었지만 생일이 빨라 한 학번 위였던 임 병장은, 정말 꽃다운 나이에 시들고 말았습니다.


흉흉해진 분위기에, 내게도 유탄이 튀었습니다.

한동안 갈굼에 시달리며 완전군장 뺑뺑이를 돌았습니다.

인생이 계속해서 꼬인다는 생각에 모든 게 원망스러웠습니다.


잠시 휴식시간, 땀으로 범벅이 돼 맥주 한 모금 마시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되뇝니다.

불현듯 임 병장의 말이 떠오릅니다.


“형이 술 한잔 꼬~옥 사줄게!”


임 병장이 건넨 마지막 한 마디였습니다.

이내 그가 건넸던 따뜻한 이야기와 마음이 다시 떠오릅니다.

살벌한 부대 분위기가 임 병장 때문이라고 원망했던 스스로가 수치스럽습니다.

임 병장은 꿈속까지 찾아와 그렇게 약속을 지켰던 것 같습니다.

힘들었던 군 생활에 용기와 위로를 준 당신은 좋은 형이었습니다.


벌써 20년도 넘게 지났군요.

어디 계시든 행복하세요.

형이 사준  시원한 맥주,  따뜻했습니다.


맥주(麥酒) ‘보리로 만든 입니다.

보리를 싹 틔워 만든 맥아(麥芽: 보리 맥, 싹 아/malt/엿기름)로 즙을 만들어 여과한 후, 쌉싸래한 맛을 내는 홉(hop)을 첨가해 발효시킵니다.

여기서 ‘엿기름’은 엿으로 만든 기름[oil made of taffy(sugar)]이 아니라, 보리싹을 엿으로 기른 물질을 뜻합니다.


맥주의 영어단어 ‘beer’의 어원으로는, 마시다란 뜻의 라틴어 ‘비베레(bibere)’와 곡물을 의미하는 게르만어 ‘베오레(biore)’가 있습니다.


‘곡식(보리)으로 만든 취할 거리’라고 이해하면 편한데, 문제는 우리나라 맥주가 맛이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세금을 덜 내려고 몰트의 함량을 낮춘 일본의 발포주를 본딴 음료를, 여전히 맥주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는데요.

깊고 풍부한 맛은 옅어지고, 대신 톡 쏘는 맛만 난무합니다.

맥주 업체들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비난한다는 볼멘소리를 하기 전에, 옛날 맥주맛을 돌려주면 좋겠습니다.


맥주와 함께했던 애틋했던 그 시절의 맛이 사라지는 듯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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