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풀 Jul 01. 2022

[뜬금없는 꿈은 뜬금없지 않을 때도 있다-약과]

약과면 이 정도지~

1999년 여름, 장마가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휴학을 하고 초중고생 보습학원에서 일했던 나는, 한 방송사의 개그맨 시험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원서접수를 하려면 방송사까지 직접 가야 했는데, 오전에 시작해 한밤중에 끝나는 업무 때문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초조함도 커져 갔습니다.


삼성역에서 여의도로 가는 버스를 기다립니다.

처음 보는 빨간색 버스 앞창엔 여의도란 글자가 또렷합니다.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지만, 시간에 쫓겨 차에 오릅니다.

앉을 자리를 찾아 버스 뒤편으로 가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입니다.


“태근이 형, 이게 얼마 만이에요?”


태근 형은 고등학교 한 학년 선배로, 같은 하숙집에서 1년을 함께 지냈습니다.

말을 조금 더듬는 탓인지 말수가 적었지만, 후배들에겐 참 따뜻하게 대해주는 형이었습니다.

맛있는 반찬이 나오면 후배들 앞으로 접시를 밀어줬고, 고3 수험생 스트레스도 부린 적이 없었습니다.

팍팍한 내 형편을 알아서인지 내겐 더 각별했습니다.

하숙집을 떠나던 날 모습이 떠오릅니다.


“너희부터는 수능이지? 참고서는 줘도 쓸모가 없겠다. 줄 수 있는 건 이게 마지막이네.”


형은 깔끔하게 다려진 교복을 물려주고 떠났습니다.


그 후로 무려 7년이 지났는데, 오랜만에 본 태근 형이 대답을 안 합니다.

흘깃 한 번 스쳐 보더니, 창밖만 바라봅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떨어진 자리에 앉습니다.


“약과 먹어.”


개그 아이템에 골몰해 있는데, 누군가 작은 약과를 건넵니다.

태근 형입니다.


“형, 깜짝 놀랐잖아. 좀 전엔 왜 모른 척했어요?”


“약과 먹어.”


“형, 나 과자 안 먹는 거 알잖아? 웬 약과래요?”


묻는 말에 대답이 없습니다.


“나 여기서 내린다.”


“형, 도로 한복판인데 어떻게요?”


“잘 지내.”


잠시 후 버스가 서고, 올림픽대로 한복판에서 태근 형이 내립니다.

버스가 출발하고,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보는 형의 모습이 점점 작아집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자명종 알람이 울립니다.

꿈이었습니다.


내게 따뜻하게 대해준 이에게 너무 소홀했단 생각이 듭니다.

교복까지 물려줬는데, 연락 한 번이 없었습니다.


출근길에 하숙집 후배들에게 태근 형 연락처를 묻는 메시지를 보냅니다.

형을 만나면 하숙 시절 좋아했던 순대랑 제육 볶음이랑 통닭을 신나게 먹고, 분위기 근사한 바에서 칵테일도 대접하는 상상을 합니다.

밥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허기가 밀려오고, 벌써부터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학원에선 시간이 성큼성큼 지나갑니다.

아이들 수업과 사무실 관리업무에 쫓기다가 늦은 퇴근길에 오릅니다.

수업 때문에 꺼뒀던 휴대폰을 켜니, 후배의 문자가 와있습니다.


‘형, 태근이 형 작년에 돌아가셨대요. 버스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어제가 기일이었나 봐요.’


갑자기 귓속에 삐이 소리가 들립니다.

둔탁한 도구로 머리를 한 방 얻어맞은 듯합니다.


‘약과가... 그래서 약과가 있었던 건가? 제사음식으로?’


형은 왜 내 꿈에 찾아온 걸까요?

무엇을 전하려고 했던 걸까요?

미안한 마음과 무서움이 뒤섞인 기묘한 밤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약과(藥果)는 ‘약 약(藥: medicine, drug)’자에 ‘열매/과자(果) 과’자로 이뤄진 낱말입니다.

치료제 ‘약’이 아니라, 보약처럼 건강에 이롭단 의미로 쓰입니다.(비슷한 용례로 술을 에두르는 ‘약주-藥酒’란 표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만드느라 곡물과 꿀, 기름 등을 많이 허실함으로써, 물가가 올라 민생을 어렵게 만듭니다.

나라살림이 어려웠던 고려 명종 22년(1192)과 공민왕 2년(1353)에는, 약과 제조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약과에 대한 선망이 있었나 봅니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는 “그 재료인 밀은 춘하추동을 거쳐서 익기 때문에 사시(四時)의 기운을 받아 널리 정(精)이 되고, 굴은 백약(百藥)의 으뜸이며, 기름은 살충(殺蟲)하고 해독(解毒)하기 때문이다.”고 약과 재료의 특징을 설명합니다.

달고 부드러워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어, ‘이 정도는 약과’라는 표현이 생겼다고 합니다.


뇌물과 관련한 유래도 있습니다.

고급음식이라 뇌물로 사용되던 약과가 벼슬아치들의 부패가 심해지며, 가치가 낮아진 거죠.

훨씬 값비싼 뇌물들에 가려져 ‘이건 약과네.’란 말이 나왔다는 설명도 재밌습니다.


항상 내게 뭔가 주곤 했던 태근 형은, 또 뭔가 베풀었던 것 같습니다.

잠시 돌아왔다 가는 길에,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뒀던 약과를 건넸나 봅니다.



[자투리 이야기] 과자의 어원


과자는 왜 ‘열매 과(果)’자로 표기될까요?


시작은 일본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일본어로 과일을 ‘쿠다모노(くだもの: 果物: 과일 과, 사물 물)’라고 부릅니다.

‘쿠다모노’는 중국 한자인 ‘菓子(카시: かし)’와 ‘果子’로 표기되고 있었습니다.


나라시대(奈良時代), 당나라에 보냈던 견당사(遣唐使: 보낼 견, 당나라 당, 사신 사)들이, 귀국하며 중국식 전병을 일본에 들여옵니다.

곡물로 만든 달콤한 이 간식은, ‘당나라에서 온 과일 같은 기호식’이라는 의미로 ‘카라쿠다모노(唐菓子: 당나라과자)’라고 불립니다.


이후 원래 열매 과일은 果物(쿠다모노), 달콤한 과자는 菓子(카시) 구분했다고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고객은 고귀한 손님이 아니라, 단골손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