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회사에 새로운 직원이 왔다.
백합처럼 하얀 살결과 이국적인 깊은 눈망울, 부드러운 갈색 단발머리에, 탤런트 이소연이 떠올랐다.
30대 초반 나이에 벌써 차장이란다.
아주 유능한가 보다.
퇴근길 회사 앞 언덕을 내려오는데, 그녀가 거리에 서있었다.
화려해 보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차에 오른다.
포르쉐다.
그제서야 기억났다.
회장님 빈소에 찾아왔던 사람이다.
검은색 단정한 옷을 입어도 수려하게 빛나던 그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상류사회 사람이다.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내 앞에 차가 멈췄다.
"신 과장님, 타세요. 우리집 근처 사시던데요."
"저 학원 가는데요."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야?
내가 왜 이리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거지?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 올리며 그녀가 말했다.
"그럼 내일은 시간 내주셔야 해요."
대체 왜?
어느덧 발길이 학원에 다다랐다.
수업에 들어갔는데, 선생님이 일정표를 나눠줬다.
가정방문을 오겠다고 한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어머니는 집에 안 계실 때가 많습니다."
"괜찮아요. 학생이 어떻게 사는지 보려는 거니까요."
대체 30대 초반 아리따운 스페인어 강사가 무슨 이유로 마흔 하나 아저씨네 집에 온다는 거지?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겉절이를 담그고 계신다.
"엄마, 집에 선생님 온대."
"무슨 일로? 학교 다닐 때도 안 오던 선생님이 다 찾아온다니?"
"그러게요. 나 말썽 부린 일도 없어요."
"아무튼, 방 환기 시키고 페브리즈 뿌려."
탈취제를 뿌린 후, 운동복 차림으로 동네 산책을 나섰다.
상가 앞을 지나는데, 누군가 전단지를 나눠준다.
아가씨 얼굴인데 교복 차림이다.
"안녕하세요, 새로 개업했어요. 안에 들어오셔서 방문 기념샷 찍어 주시면, 예쁜 선물 드리고 있습니다."
스튜디오였다.
공부방과 거실, 옷방 컨셉의 공간으로 구성되고, 그 곁으로 작은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책상과 책꽂이였다.
맨투맨 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이 펼쳐져 있었다.
"사진관인가요?"
"아뇨, 저희 크루들이 저 공간에서 실제 학생처럼 생활하는데요. 저 옆 공간에서 지켜보며 사진도 찍으실 수 있습니다."
이런, 젠장.
이것도 일본에서 유행하는 건가?
"됐어요. 사람 뭘로 보고. 나가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그래도 선물은 받아가세요."
그래, 애초에 사은품에 홀려 들어왔던 거였다.
"잠시 여기 앉아서 차 드시고 계시면, 바로 선물 준비해 올게요."
잠시 후 그녀가 들어왔다.
커리어 우먼 차림이었다.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이 속삭인다.
"선물은 저에요. 짐작하셨겠지만..."
대체 뭐지, 이 현진건과 와와의 ‘운수 좋은 날’ 같은 상황은?
이건 누군가 함정을 파놓은 게 분명하다.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데 그녀가 가로막는다.
"나 예쁘지 않아요?"
대답 대신 나도 모르게 와락 그녀를 껴안고 말았다.
그렇게 잠에서 깨고 말았다.
TV가 켜져 있었다.
구조조정에 대한 불안과 외국어 스트레스와 욕구 불만의 영향을 받은 꿈일까?
기러기 생활이 길어지니, 야릇한 꿈도 잦아지나 보다.
사춘기가 다시 왔나 보다.
사춘기(思春期)는 봄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여기서 봄은, 춘화도의 춘처럼 성적 활동을 가리킨다.
‘짝짓기 욕망이 움트는 때’란 뜻이다.
그래서 농담이라도 ‘오춘기’란 표현 들으면, 안쓰러워진다.
교육 과정에서 어원풀이가 중요한 이유다.
그나저나 귀한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