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얼굴 뒤에 숨은 폭력
많은 사람들은 믿는다.
구약성경은 폭력적이지만, 신약성경은 평화롭다고.
예수의 입에서 나온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차근히 읽어 보면, 그 평화의 얼굴 뒤에서
지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는 사랑을 말했지만, 그 입에서는 “게헨나의 불”,
“바깥 어두운 곳”, “영원한 불”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바울과 다른 저자들도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형벌”을 반복해 경고했다.
신약은 평화와 사랑을 노래하는 동시에,
협박과 공포를 가장 정교하게 결합시킨 책이었다.
사랑은 초대였고, 지옥은 그 초대장을 거절한 자들에게 떨어진 형벌이었다.
흥미롭게도 구약성경에는
오늘 우리가 아는 ‘지옥’이 없다.
죽은 자는 모두 스올(무덤)로 내려갔다.
그곳은 단지 어둡고 고요한 사후의 공간이었다.
의인도, 악인도 함께 내려가는 곳.
불타는 형벌도, 영원한 고통도 없었다.
지옥은 구약의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훗날 외부의 사상,
다른 종교의 그림자에서 빌려온 개념이었다.
지옥 사상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은 이란의 고대 종교, 조로아스터교였다.
선과 악,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이원론적 사유가 뚜렷했던 그 종교는
페르시아 제국을 통해 이스라엘에 스며들었다.
바빌론 포로기를 거치며
이스라엘은 “이 땅의 신앙”에서 “사후의 신앙”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늘과 지옥, 상벌의 사후 세계.
그것은 신약 시대에 이르러 교리의 중심이 되었다.
“게헨나의 불.”
“영원한 불.”
“바깥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며 슬피 울리라.”
마태복음의 예수는 이 단어들을 자주 말했다.
게헨나는 본래 예루살렘 외곽의 힌놈 골짜기,
시체를 태우고 제사를 지내던 불길한 장소였다.
그 불길의 이미지가 점점 확대되어, 영원한 형벌의 상징이 되었다.
마태복음은 은혜의 복음을 전하면서도,
지옥의 협박을 결코 놓지 않았다.
사랑과 공포의 언어가 한 입에서 함께 흘러나왔다.
요한계시록은 그 상상을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불과 유황의 못.
짐승과 용이 던져지는 무저갱.
끝나지 않는 고통의 날들.
그것은 단순한 묵시가 아니라, 신학의 상상력을 넘은 공포 영화였다.
하늘의 복음은 지옥의 형벌과 맞물리며
인류의 마음을 지배하는 새로운 방식이 되었다.
역사 속에서 교회는 이 언어를 잊지 않았다.
중세의 설교자들은 불타는 그림을 들이밀며 말했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저 불 속에 떨어진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의 구조를 너무나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그 문학은 신앙이 되었고,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사랑만으로는 사람을 묶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과 지옥을 함께 가르쳤다.
하나는 위로를 주고, 다른 하나는 복종을 강요했다.
21세기 교회에서도 여전히 같은 말이 울린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어디로 간다고 했지?”
“지옥이요.”
어린아이들의 입에서 이 단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사랑의 복음과 지옥의 협박은 여전히 한 세트다.
사랑만으로는 느슨해지고, 협박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
그래서 그 둘은 지금도 신앙의 쌍둥이처럼 함께 존재한다.
구약에는 지옥이 없었다.
지옥은 신약의 창조물이자, 하늘의 복음에 스며든 새로운 폭력이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 말했지만, 그 사랑은 언제나 조건부였다.
믿지 않으면, 불타리라.
회개하지 않으면, 버려지리라.
신약의 하늘은 평화의 이름으로 열렸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불길이 타고 있었다.
그 불은 단지 죄인을 태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두려움을 길들이기 위한 불이었다.
사랑의 얼굴 뒤에 숨어 있는 불길,
그것이 신약이 남긴 폭력의 진짜 형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