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자아 내려놓기

주체의 고백

by 신밧드

우리는 흔히 자신을 이미지로 느끼며 살아갑니다. 어떤 모습의 나인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 어떤 평가를 받는지가 곧 나 자신인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이미지만으로는 삶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이미지는 흔들리고,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곧 말을 불러옵니다. 설명하고, 규정하고, 옳고 그름을 가르며,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언어를 덧댑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삶에서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나란히, 동시에 작동합니다. 이미지는 나를 느끼게 하고, 말은 그 이미지를 보호합니다.


사울과 바울의 삶도 이 세계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분명한 이미지로 이해했고, 그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단단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심, 확신에 찬 판단, 단호한 구분은 흔들림 없는 신앙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단단함은 언제나 안정의 증거만은 아닙니다. 때로 그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아가 걸친 가장 두꺼운 갑옷입니다.


동성애에 대하여 바울이 보였던 지나친 정죄와 혐오는 이 구조 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성은 언제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영역입니다. 쉽게 설명되지 않고, 말로 완전히 정리되지 않으며, 개인의 깊은 곳을 건드립니다. 이런 영역을 견디기 어려울 때 사람은 그것을 규범과 도덕, 정죄의 언어로 덮어버립니다. 말이 단정해질수록, 판단이 과감해질수록, 그 안에는 설명되지 않은 불안이 남아 있습니다. 강한 확신은 종종 흔들림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 구조는 신비 체험에서도 반복됩니다. 바울이 말한 삼층천 체험은 오랫동안 신앙의 정점처럼 읽혀 왔습니다. 실재에 도달한 증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본 사람의 경험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조금만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그는 그 경험을 ‘셋째 하늘’이라는 분명한 단계로 말하고, 기존의 우주론적 언어 안에 배치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이미 그것을 말의 구조 속에 옮겨 놓았습니다.


실재는 오래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로 완전히 붙잡히지 않고, 구조로 정리되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갑니다. 그렇다면 삼층천은 실재 그 자체라기보다, 실재가 스쳤을 가능성을 곧바로 상징계의 언어로 감싸 안은 사건에 가깝습니다. 바울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말로 돌아왔고, 설명 가능한 이야기로 경험을 정리했습니다. 이것은 실패라기보다 인간의 방식입니다. 사람은 실재를 오래 견디지 못하고, 다시 이미지와 말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내려놓기라는 말이 새롭게 보입니다. 많은 신앙의 언어에서 '내려놓음'은 결단과 선택을 의미합니다. 내가 욕심을 내려놓고, 내 생각을 포기하면, 더 나은 신앙의 자리에 이를 수 있다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내려놓기'는 전혀 다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내려놓은 결과가 아니라, 더 이상 붙들 수 없게 되었을 때 남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확신이 더는 나를 지켜주지 못하고, 이미지가 나를 보호하지 못하며, 말조차 방패가 되지 않는 순간. 그때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이미지와 언어에 기대어 살아왔는지를 알아차립니다.


바울 역시 이 자리를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재에 머문 완성자가 되지 않았고, 이후에도 말하고 가르치며 상징계 안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신앙이 미완이거나 실패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의 의미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는 완성에 도달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 아니라,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채로도 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확신을 과시하는 언어가 아니라, 흔들림을 포함한 언어로 공동체를 향해 계속 말을 건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앙의 도착점이라기보다 방향에 가깝습니다. 그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동시에 작동하는 세계에서 살았고, 대부분의 사람 역시 그 세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울이나 바울,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경계에 서 있습니다.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말과 규정 속에서 안정을 찾는 자리. 붙들고 있으면서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자리 말입니다.


상상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미 상상계만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말속에 살고 있고, 규정 속에서 숨 쉬며, 판단 속에서 자신을 지탱합니다. 다음에 다루게 될 상징계는 전혀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발을 담그고 살아오던 세계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이 경계에서 주체는 비로소 자기 고백을 시작합니다. 더 단단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단단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바울

나는 끝까지 붙들고 있던 이름을
내려놓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이름이 나를 더는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알아버렸을 뿐이다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빛은 나를 위로 끌어올리지도
아래로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말을 잃는 순간을 만들었다
그 앞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었고
무엇을 얻었다고도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눈을 감았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확신은 문장으로 굳어지지 못했고
율법처럼 단단하던 말들은
손에 쥔 채로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나는 그 말들을 잃었다기보다
그 말들이 더 이상 나를 대신 말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침묵은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침묵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여전히 말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 이후로
말하기 전에 먼저 도착하는 숨이 있다는 것을
그 숨이 사라진 뒤에야
말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나를 옳은 자리에 올려놓지도
누군가를 단정적으로 밀어내지도 않는다
말은 이제 방패가 아니라
흔들림을 견디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에 가깝다


나는 도달하지 않았고
완성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완성된 척 말하지도 않는다
이름이 불릴 때 도망치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사울과 바울 사이에서
이미지와 말 사이에서
붙들림과 내려놓기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서 있다


그 경계는
넘어가야 할 선이 아니라
살아내야 할 자리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2장. 영원한 자기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