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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속의 고목나무 May 31. 2022

예식장 풍경

부족함은 가릴 게 아니라 채워야 하는 것

  친구 아들의 혼사가 있어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겨우내 움츠렸던 모든 생명이 다시 소생하는 봄은 확실히 결혼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충주쯤에 이르자 남쪽에는 이미 파장 난 벚꽃 잔치가 자리를 옮겨 새판 벌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신랑의 얼굴이 빛났다. 종일 내리쬐는 봄볕에 벚꽃이 익어가듯 친구 부부의 쉼 없는 내리사랑에 자식도 저렇게 무르익었을 것이다.


  아직 코로나19 사태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는데도 예식장은 제법 북적였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축하 화환 행렬이었다. 금방 알만한 인사가 보낸 것도 몇 보였다. 학창 시절부터 공부를 잘한 데다 성격도 원만했던 친구의 너른 발품이 보였다. 예식 시간이 다가오자 하객들이 점점 많아져 부조금 수납처는 줄까지 이어졌다. 축하객이 붐비는 친구 측과는 달리 신부 쪽의 분위기는 한산했다. 줄곧 미소를 띠고는 있지만 왠지 쓸쓸해 보이는 그쪽 혼주의 표정이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코로나 사태가 발발하기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딸아이로부터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머지않아 곧 혼사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매사에 신중한 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언젠가부터 마음 한구석에 늘 매달려 있던 뭔가가 털썩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것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나 혼자만의 고민이었다. 혼담이 오가고 상견례까지 이어진 후 마침내 혼삿날이 정해졌다. 남들이 말하는 ‘기쁜 날’은 다가오는데 내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져갔다. 그것은 마치 시험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학생이 시험 날짜를 기다리는 심정과 같았다.


  젊었을 적 직장생활을 할 때는 적잖이 남들 경조사에 뛰어다녔던 것 같다. 사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 한국인들의 일상적인 사회생활 중 하나이다. 상대방과의 인간관계를 결속하는 수단이 되는데다 상부상조의 의미도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사자와 내가 그럴만한 관계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청첩이나 부고를 받은 이상 대부분 모른 체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관계 형성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고 앞으로 다가올 내 앞날에 대한 협조 요청의 의미를 전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이 또한 내 생각과는 많이 어긋나버렸다.


  IMF 사태는 평온했던 내 삶을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신호탄이었다. 다니던 직장이 정부의 일방적인 조치로 강제퇴출 되자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조직의 구성원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생존 위기에 직면해 저마다 내지르는 아우성에 인간관계인들 온전할 리 있겠는가. 친목이니 상부상조니 하는 말은 사람들의 사전에서 사라지고 생존투쟁이라는 섬뜩한 단어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얼마지 않아 전 국민의 금 모으기 운동으로 최단기간에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세계가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과는 동떨어진 헛소리에 불과했다. IMF는 끝났지만 내 추락은 멈추지 않은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에서의 추락을 못 견디고 대륙으로 건너가 십 년여를 떠돌다 다시 돌아왔다. 세상은 아무 일 없었던 듯 고요했지만 내 호흡은 여전히 거칠었다. 나는 옛날보다 훨씬 더 가난해져 있었고 가정마저 파탄이 나 사람들과의 거리는 한층 더 멀어졌다. 오랜 해외생활로 국내에서의 인간관계가 거의 허물어진데다 가난과 이혼이 부끄러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딸아이의 결혼식을 맞이한 것이다.


  결혼식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점점 더 고민이 깊어졌다. 친하게 지냈던 옛날 직장 동료와 과거 내가 경조사에 참석했던 인연들에게 연락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누렇게 변색된 옛 다이어리의 기록을 들춰보면서 노심초사한 것이다. 본전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하객이 너무 적어 이대로라면 초라한 내 모습이 드러나는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바깥사돈은 명문학교 출신의 성공적인 사업가인데다 안사돈 또한 전문직업인이어서 사돈 집안과 너무 기울어진 모습으로 대비되는 게 두려웠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책을 세워야했다.


  나는 결국 결혼식 하객을 대행해 준다는 업체에게 연락했다. 하객의 숫자가 많을수록 단가가 싸고, 단순 참석뿐만 아니라 각종 이벤트에다 심지어는 가족사진 촬영에도 나서준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따른 비용은 단계별로 지불해야 했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져 수십 명을 보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체면을 세우기 위한 일이니 비용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꽃집과 거래하고 있는 친구를 통해 그럴싸한 화환을 가급적 많이 보내달라고도 부탁할 참이었다. 비록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이 끊어지긴 했지만 옛 동료들과 학교 동기회에도 연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것이 딸을 위해서도 내 체면을 위해서도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결혼식 날이 밝았다. 비록 헤어지기는 했지만 아이 엄마와 나는 딸의 결혼식 하객을 맞이하기 위해 같이 섰다. 함께 아이를 낳았지만 서로 남남이 되어 딸을 출가시키는 현실에 잠시 마음이 울컥했다. 딸에게도 미안했다. 예상대로 사돈 측의 하객은 축의금을 내기 위해 어마어마하게 긴 줄이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계속 진열되는 화환은 그 넓은 공간이 비좁을 정도로 끝없이 이어졌다. 반면에 나의 하객들은 가까운 친지와 절친한 친구 몇 명이 전부였다. 그나마 그날 단체 야유회 행사를 마치고 찾아 준 시골 초등학교 동창 몇 십 명이 함께 했지만 상대적으로 초라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잠시 후 바깥사돈이 내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쪽으로 화환을 좀 옮겨놔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많이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바깥사돈 측으로 온 수많은 축하 화환 중 일부가 우리 쪽의 휑한 공간으로 옮겨졌다. 누가 봐도 양가의 축하객과 진열된 화환의 숫자가 너무 대비되어 이를 보다 못한 사돈이 나선 것이다. 물론 악의적으로 보면 그 행위가 자신의 체면을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모로 부족한 내 딸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지금껏 내가 봐 온 그분의 인격으로 미루어볼 때 그날의 행동은 나를 위한 배려였음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고 결혼식 내내 무거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한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빨리 결정해 주셔야 우리도 사람을 미리 준비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 며칠 전까지 하객 대행업체는 나를 압박했다. 당초와 달리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많아졌다. 과연 이것이 온당한 일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이었다. 우선 그날이 자식이 결혼하는 혼삿날인지 내 체면이 진열되는 전시회인지 결론지어야 했다. 물론 정답은 전자다. 다만 후자에 눈길을 쏟는 우리의 관습과, 그 눈길이 두려워 떨고 있는 내가 문제일 뿐이다. 나는 내 삶의 성적표를 머릿속에 펼쳐 봤다. 물론 학교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좋은 성적은 아니다. 또한 학교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을 때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이혼 후에도, 또한 사업 실패로 알거지가 되어 피눈물 흘리며 대륙을 떠돌 때에도 결코 자식들의 손을 놓지는 않았다. 적잖은 세월 동안 아이 셋을 부둥켜안고 삶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고 보니 내 삶은 비록 성적은 나쁘지만 결코 커닝은 하지 않았던 내 학창시절과 닮아 있었다. 살면서 결코 그 시절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듯이 지금의 내 삶도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딸과 사위가 새 출발하는 첫날부터 위장된 축하객으로 예식장을 오염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오로지 뜨거운 아비의 가슴만으로 딸의 결혼을 축하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대행업체에게 계약금을 포기하겠다는 내 뜻을 전했다. 또한 옛 동료들과 과거 인연들에게도 일절 연락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당초 화환을 부탁하려 했던 친구에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날 내게 보내온 축하 화한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기울어진 결혼식이라고 수군거렸을 것이다. 그로 인해 사돈은 사돈대로, 나는 나대로 체면이 많이 구겨졌을 수도 있다. 또한 그날 드러난 나의 가난과 부족함이 딸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단 하루의 위장으로 그날을 그럭저럭 넘긴다면 나는 바로 다음날부터 또 다른 위장의 삶을 준비할 것이며, 결국 내 남은 인생은 계속 허장성세로 도배될 가능성이 높다. 기울기는 탁월함과 부족함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내 딸이 결혼하던 그날 사람들의 시선을 불편하게 했던 그 불균형은 사돈의 탁월함과 내 부족함에서 초래된 것이다. 탁월함은 시기할 게 아니라 인정해야 하고, 부족함은 가릴 게 아니라 채워야 하는 것이다. 능력이 모자라면 마음으로라도 말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착잡한 마음으로 손님맞이를 하고 예식을 했던 시간은 그야말로 잠시라도 해도 좋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그 '잠시' 동안의 체면 때문에 그렇게 노심초사했던 게 헛움음이 나올 정도로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제 곧 예식이 시작된다. 손님맞이를 마치고 예식장으로 향하는 친구의 사돈내외분들도 지금은 발걸음과 마음이 많이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들도 지금의 나처럼 헛웃음을 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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