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과 그리움이 이끈 걸음
오륙 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여전히 편치 않았다. 얼마 전부터 마음이 가라앉고 가끔 왼쪽 가슴이 저려와 힘들었다. 별로 먹지도 않았는데 명치끝은 늘 체한 듯 묵직했다. 잠자리는 편찮았고 뜬금없이 흐르는 눈물에 스스로가 화들짝 놀란 적도 있었다. 괴이한 일이었다. 먹고사는 문제로 힘든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니 그 때문일 리는 없다. 얼마 전에 큰마음먹고 한 종합검진 결과도 별 탈 없다 하니 건강 문제도 아닐 것이다. 혼자 살아온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외로움 때문인가 싶지만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손 눈물까지 훔치겠는가. 이 이상한 증상이 시작된 것은 지난달부터였다. 그러고 보니 짚이는 게 있었다. 무던하게 커 오던 막내 녀석이 해병대에 입대한 후부터였던 것 같다. 아이는 아직 훈련받느라 밤낮으로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세월이 좋아져서 해병대 가족모임 카페에는 아이들의 훈련소 생활과 훈련 일정이 나날이 공지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녀석이 인사하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거수경례하더니 “부모님 사랑합니다. 친구들아 편지해라!”라고 말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등산복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60리터 배낭에 이것저것 쑤셔 넣어 15킬로 남짓 되게 짐을 꾸렸다. 걸머질 때에는 관절이 흔들렸다. 집을 나서면서도 해낼 수 있을지 스스로가 미덥지 않았다. 배수진을 친답시고 지갑은커녕 동전 한 닢도 지니지 않은 채 길을 나섰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나선 걸음이었다.
벚꽃이 산하를 훑고 지나갔지만 들녘은 푸석했다. 사람들이야 벚꽃이 피었다고 난리지만 강산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겨우 세수 한 번 했을 뿐이다. 조금 있으면 신록으로 짙게 분칠 할 것이니 아직은 푸석한 게 당연했다. 지금 녀석의 얼굴도 이럴 것이다. 들판에 윤기가 나려면 아무래도 보리가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고, 다시 벚꽃이 필 때쯤 되어서야 녀석의 얼굴에도 겨우 핏기가 돌 것이다. 뒤돌아보면 금방이지만 앞을 내다보면 요원한 게 세월이 부리는 마법이다. 지난 시간은 뭉뚱그려 압축되고 남은 시간은 잘게 쪼개져 길게 늘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녀석은 그래서 앞이 캄캄할 것이다.
출발한 지 한 시간여 만에 횡계 마을 정자 앞에 도착했다. 어린 시절 소풍 와서 보물찾기 놀이를 했던 곳이다. 그때 돌부리 밑에 깔린 보물을 찾아낸 덕택에 공책 한 권을 얻었다. 어린 나는 그것이 엄청난 횡재라고 생각했다. 50여 년 전 너무 일찍 찾아온 횡재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사는 게 힘들다. 벌써 등줄기에 땀이 흥건하고 목이 탔다. 이제부터는 서서히 고도가 높아지는 지대에 들어섰다. 초등학교 여자 동창이 운영하는 식당 앞을 지나자 개가 짖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들러 물이라도 한 잔 얻어먹고 싶었지만 마음이 바빠 지나쳤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당시 내가 있는 중국으로 왔다. 부모의 이혼 때문이었다. 내가 아이들을 양육하기로 했지만 혼자 사는 남자가 외국에서 사춘기에 접어든 딸 둘과 어린 아들을 키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이들도 나도 힘든 세월이었다. 먼저 온 큰딸은 상해의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공부하고 둘째 딸과 녀석은 북경에서 나와 함께 지냈다.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아비로서 정성을 다 쏟았지만 아이들에게는 구멍 뚫린 바람막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그때까지만 해도 운영하는 사업이 잘 되고 있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후 중국인 직원들의 음모와 배신으로 사업체를 통째로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 나는 또다시 깊은 수렁으로 빠졌다. 나는 회사를 되찾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대륙을 떠돌았지만 허사였다. 그동안 어린 아이들은 아비 없는 집에서 외로움과 무서움을 참으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나는 알거지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비의 고난을 어찌 자식들이 피해 갈 수 있겠는가. 녀석은 기거할 곳이 마땅찮아 시골의 공립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고, 대학생활을 할 동안에는 방학 때마다 건설공사 현장으로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던 아이가 해병대에 입대한 것이다. 이 역시 아비의 재정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한 녀석의 고육지책이었음을 나는 안다. 누가 일부러 고생을 더 하고 싶겠는가. 당시 젊은이들의 군 입대 정체 현상이 벌어져 녀석은 그나마 조기 입대 가능성이 높은 해병대를 지원한 것이다. 한창 사랑을 받아야 할 어린 나이 때부터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한 데다 이제는 재정적인 결핍까지 덧씌운 죄책감 때문에 나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
양지, 음지 마을을 거쳐 별빛 마을이라 불리는 정각리 삼거리에 도착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이제 겨우 10여 km를 걸었고 해발고도는 200여 미터 정도 올랐을 뿐이다. 벌써 생수 두 통도 다 마셔버렸다. 천문대가 위치한 보현산 정상이 아득하게 보였다. 저기까지 가려면 지금부터 족히 10km는 더 걸어야 하고 고도는 1,000여 미터를 더 올라야 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것은 연습에 불과했다. 이곳을 벗어나면 이제 차는 탈 수 없다. 여기서 포기한다 해도 동전 한 닢 없으니 버스를 탈 수도 없다. 이제는 왔던 길 되돌아가거나 정상을 향하는 수밖에 없다. 마음을 다잡고 빈병에 물을 채워 넣었다.
길은 아이의 앞날처럼 아득하게 늘어져 있었다. 모든 정상은 땀과 시간을 바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그에 이르는 길은 늘 외롭고 힘들다. 아침나절 고향집에서 출발해 20여 km를 걸어 보현산 정상에 도달했을 때 내 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때까지 마신 물이 모두 땀으로 배출되었다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바친 땀의 양은 2리터짜리 생수 네 통이었다. 천문대 건물 앞에서 갑자기 찾아온 허벅지 통증으로 나는 기어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 광경을 목격한 직원의 부축으로 겨우 일어났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것은 방문객을 위해 설치해 놓은 자판기 속의 탄산음료를 보고 나서였다. 염치 불고하고 그에게 이천 원을 빌려 콜라 두 캔을 빼 단숨에 마셨다. 다시 살아난 느낌이었다. 몸을 일으켜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이 산길로 5km 정도 하산하면 청송과 경북 북부 지역을 잇는 국도가 나올 것이다. 거기서 다시 영천 방향으로 5km를 더 걸어 내려가면 고향집이 나온다. 또다시 걷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러나 허벅지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고서야 도로변에 도착했다. 두 시간이면 족히 내려올 거리인데 거의 네 시간이 걸렸으니 어지간히도 절뚝거렸던 모양이다. 차를 얻어 타고 싶었지만 포기하고 계속 걸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이 허벅지로 몰려드는 느낌이었다. 걸으면서 눈물도 흘렸던 것 같다. 그렇게 정신마저 조금씩 흔들릴 즈음 마침내 고향집에 도착했다. 밤 10가 넘은 시각이었다. 나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부엌으로 향했다. 사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14시간에 걸쳐 30km를 걸어 올 동안.
며칠 전 해병대 가족 모임 카페에서 이번 주부터 극기주가 시작되었다고 공지했다. 이 기간 동안에는 거의 잠을 재우지 않는 데다 배식까지 줄인 상태에서 밤낮으로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는 모양이다. 특히 극기주의 마지막 날인 오늘 밤에는 그렇게 체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군장을 한 채 밤새 산악행군을 한다고 한다. 이름하여 해병대 훈련의 상징인 ‘천자봉 행군’이다. 이 관문을 넘어야 비로소 해병대의 빨간 명찰을 달 수 있다니 오늘 밤 내 아이도 그 대열에 설 것이다. 나는 녀석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식을 위해 아비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마음만이라도 아이와 함께 하고 싶어 배낭을 걸머메고 홀로 길을 나선 것이다. 아이는 천자봉 행군을 하고 아비는 보현산 행군을 한 셈이다.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단 한 번도 배낭을 열지 않았다. 아예 먹을 것을 하나도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도 오늘 밤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해병 2사단에서 복무하는 동안 두 차례나 통합병원에 입원했다. 훈련 도중 부상을 당해 수술대에 올랐을 때 나는 또 한 번 가슴을 움켜쥐어야 했다. 녀석은 이듬해 겨울에 제대한 후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중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남들은 이제 늠름한 청년이라고 하지만 나는 늘 안쓰럽고 보고 싶다. 아직까지 아이에게 나의 행군을 말하지는 않았다. 녀석의 인생에도 언젠가는 힘들고 아픈 날이 닥칠 것이다. 그때 세상 끝나는 날까지 함께 할 아비가 늘 옆에 있다는 마음을 담아 그날의 일을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