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랗고 울창한 숲을 거닐었다. 그는 숲을 거닐면서 여러 가지의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고 있었다. 숲은 항상 조용하며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복잡한 심경을 조각내어 분해하는 데에 안성맞춤이었다. 새들은 노래를 부르며, 풀들은 바스락바스락 연주하고 있었고, 거기에 맞춰 강가라도 보이면 조약돌을 던져서 리듬에 맞춰 연주를 하곤 했다. 오랜만에 오는 숲이라 이상하게 낯설기만 한 탓인지 숲 내음을 깊게 음미하고 있었고, 옛날 생각이 났는지 눈살을 찌푸리다가도 생각에 잠든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흙과 풀 위에 자신의 겉옷을 덧대어 포근한 침대를 만들어 누워버렸다. 이 장소는 사람이 없는 곳을 한참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었고, 어릴 적부터 자주 오는 장소였다. 그러고 보니 이 장소를 아는 사람이 한 명이 더 있었다. 동갑내기 여자아이였는데, 어릴 적 겁쟁이에 눈물이 많으며 부정적이던 그 와는 달리 밝고 용감했으며 동화 속에 나오는 용사님 같았다. 항상 앞서서 그를 데리고 이곳저곳 숲을 누비며 놀기를 좋아했고, 그러다가 이 장소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곳의 나무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커다란 울타리처럼 자라 있었고, 위의 하늘을 올려다보면 커다란 하늘색 구멍에 햇빛이 아른거리며 빛을 내뿜고 있었다. 또한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 하나 없이, 항상 햇빛만이 아닌 모든 곳에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와 그녀는 단순하게 울타리 숲이라고 자신들만의 언어를 녹여내어 명칭을 정했다.
그는 문득 어릴 적 그녀가 떠올랐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탓인지 모든 게 부정적이고, 모든 게 어두워 보였던 그한테 세상의 흰색 도화지를 주었던 게 그녀였다. 어두웠던 그의 도화지를 버리고, 그녀는 새로운 도화지를 그에게 건넸다. 그 후로, 그는 세상이라는 도화지를 밝게 색칠하였으며, 혼자 헤쳐나갈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얻었다. 그렇게 새로운 도화지와 함께 달콤함을 얻은 그는 도화지는 어두운 색으로 물들지 않게, 달콤함은 쓴맛과 떫은맛으로 변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다시 만났을 때의 실망과 위로가 섞인 그녀의 표정보다는 이번에는 새로운 표정을 보고 싶어 했기에 그는 망상에 빠져 즐거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