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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키 Oct 17. 2022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를 해야 할 때

나는 어떻게 바람직한 의사소통을 지속할 수 있을까?

괴산살이가 여러 면에서 다른 나를 만나게 한다. 대부분  별로 기분이 좋은 경험들은 아니다. 벌거숭이로 사람들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가도 하니까 말이다. 이제까지의 교육과 훈련받은 언어 등 나를 보호해 줬던 것들이 방패막이들이 여기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나를 전혀 보호해주지 않는다.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 본 경험이 적지 않은 나인데도 여기 문화를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어째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통하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지...


부조화와 갈등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더욱 자주 드러낸다. 특히 최근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습관과 언행 중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언어 표현에 과도하게(?) 날 선 나의 반응이다.


사실, 불편한 느낌이 내 속에서만 머물면, 문제가 그리 크지는  않을 거다. 그건 오히려 언어에 대한 나의  높은 감수성이 드러나는, 나의 전문적 능력을 입증하는 걸로 볼 수도 있으니까. 오래전 언어의 영향력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 트레이니 모두는  다른 사람의 세상 모델을 존중하지 않는 언어 패턴에 대한 인식 훈련을 매우 강도 높게 받았었다.


그래서일까? 난 다른 사람의 언행을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참 황스럽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무례한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사람들을 만나면 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르는 걸 느끼기도 한다.


사람들은 참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들의 능력이나 진실성을 자기 기준에 맞춰 폄하하는 말들마구마구 해댄다. 특히 자기 합리화 즉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전문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일어나는 반응이라 해도 내면의 부정적 흐름을 얼결에라도 밖으로 흘리면 상대방을 다치게도 하고 종국에는 관계를 망쳐버릴 수도 있음을 종종 경험한다. 그렇다. 민감한 내 반응에 기반한 나의 부정적 언행들, 얼굴에 드러나는 싫은 표정 혹은 짜증 섞인 말투와  선생님 톤으로 지적질하기 등 로인 것들 말이다.  


문제는 트레이닝 혹은 강의가 아닌 현실의 일상 속에서 언어에 대한 인식이 나와 너무 다른 이들과 소통해야 된다는 데 있다. 상대방의 언행이 마땅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는 걸 알아차려도 어떻게든 지속적인 소통을 그것도 바람직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므로 내 과제는 다른 사람의 부적절한 언행과 마주칠 때  생겨나는 정직한 내 반응을 스스로 인지하면서 상대방의 언행을 굳이 문제 삼지 않는 거다. 그렇게 해서 싫은 표정이나 지적질 언사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문득, 그들의 틀을 내게 씌우려는 거에 반발하는 내가 그들에게  기준을 강요하는 건 아닌가 싶은 의문이 생겼다.


감히 말할 수 있는데, 나의 기준이라는 게 사실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습득된 지식과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는 거다. 나도 본래 언어 사용에 그렇게  민감한 사람은 아니었을 거다.  그렇다. 모든 사람이 의사소통에 대해서 혹은 언어의 영향력에 대해서 공부하거나 훈련받는 건 아니다.


내 기준에서 적절치 않다고 생각 드는 언사를 쓰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할 때, 나의 과도한 반응이 그들에게 드러나지 않고 나의 기준이나 감정을 그들에게 들이대지 않으려면 내 틀이 좀 더 유연해져야 될 거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틀의 유연함은 사고와 행동이 일치되었 그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고방식과 언어 패턴에 대해 좀 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반복되는 부정적 패턴을 살피니 내게 부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말과 문장이 좀 더 선명해졌다. 내가 싫어하거나 나를 불편케 하는 말들, 나 스스로 금기시했던 강력한 단어 혹은 개념들과 직면해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의 터부 단어는 죽음이다. 죽음은 무조건 불길한 거고 가까이할 필요가 없다고 믿어왔다. 하여, 그 단어를 입에 담지도 귀에 넣지도 말아야 한다고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주의를 잔뜩 주곤 했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요즘 흔들린다.


최근 근거리에서 지켜보게 된 한 이웃이 죽음과 아주 친하게 살고 있는 걸 알게 됐다. 그녀의  삶의 방식에서 엄청 견고한 위안과 건강함을 느꼈다. 얼마나 진실일지에 대한 의혹은 그다음 문제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자기 생각을 갈파하는 거 같았다.


그래서일까? 어차피 피할 수도 없고 피할 필요도 없는 거라면 가까이 친근하게 대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나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가 마주할 나의 죽음에 대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개념이든, 실제의 현상이든, 내게 가장 커다란 거부 반응을 일으키던 죽음이란 단어와 친해지면서 그 보다 덜한 부정적 단어나 표현에 훨씬 덜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 알아차렸다.


툭툭 내뱉는 문장에서 부정적 전제가 감지되어 내 레이다에 걸려들던 언어 패턴도 내게 더 이상 귀의 가시가 되어 아프게 찌르지는 않는 것 같고 어떤 성향의 사람과도 비교적 마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더 좋은 건 내 민감한 감수성에 대한 변명이나 설명을 할 필요가 현저히 줄어든 거였다. 아니 나아가 좀 불편할 수 있는 성질의 대화도 부드럽게 곰삭은 가을 고추처럼 잘 익은 맛과 향이 나는 대화로 이어가는 경우도 이따금 생겼다.  


의사소통의 묘수? 많이들 얘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 해결을 제시하는  아직은 듣지 못한 것 같다. 아마도 이건 기술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일 거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면서 뱀같이 지혜로울 만큼 내 진실성도 잃지 않고 상대방도 존중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려면 결국 내가 성장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렇다. 나답게 사는 게 무언지 선명해지면 그래서 나에 대한 나 스스로의 믿음이 확실하면 상대방의 언행에 그리 쉽게 휘둘리지는 않겠지. 또 그 감정에 영향을 받아 내 생각이 그렇게 간단히 휘저어지지도 않고 말이다. 당연히 내 표정과 언어의 톤도 상대방에게 그리 불편하게 나아가지 않게 될 거고.


특히,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를 계속하려면 결론은, 내가 성장하여, 상대방이 어떤 세상 모델을 보여줄지라도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거다. 그렇다. 결국 의사소통의 묘수는 기승전 나의 성장과 타인에 대한 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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