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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를 해야 할 때

나는 어떻게 바람직한 의사소통을 지속할 수 있을까?

by 더키

괴산살이가 여러 면에서 나의 다른 모습을 만나게 한다. 딱히 유쾌한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사실 어떤 때는 벌거숭이로 사람들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바닥을 친 상황에서 사회적 경제적 결핍이 극에 달한 처지다 보니 내 모습이 아니 내 존재가 그리 썩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을 거다. 그래서일까... 이제까지 든든하게 나를 지켜줬던 내 방패막이들, 교육과 고강도의 언어 훈련이 이곳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는 오히려 괴리감만 더 키우는 요소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 본 경험이 적지 않은 나다. 그럼에도 마을 문화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대화로 나눌 수 있는 게 어쩜 이렇게까지 없는지 의아하기 조차 하다.


괴로움 유발 요소인지 아님 예기치 못한 수확일지 아직 분간이 제대로 서진 않지만 이 조그만 공동체에서 겪는 부조화와 갈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을 더욱더 선명하게 노출시키는 거 같다. 그건 이제까지 내 능력의 표상이었던 언어 소통 방식에 관한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언어 표현에 과도하게 날을 세우는 내 반응이 유난히 두드러지게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 같다. 나 자신의 언어 사용에 민감한 거야 당연하고 바람직한 거겠지만... 타인에게 까지? 처음으로 심각하게 다뤄야 하는 이슈로 내게 급 부상했다.


사실, 불편한 느낌이 내 속에서만 머물면, 문제가 그리 크지는 않을 거다. 그건 오히려 언어 사용에 대한 나의 높은 감수성의 증표로 전문적 능력을 입증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오래전부터 언어 구조와 역할, 그리고 그 영향력에 대해 공부해 왔다. 특히 다른 사람의 세상 모델을 존중하지 않는 언어 패턴에 대해 매우 강도 높은 인식 훈련을 받은 나로서는 하긴 어쩜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 거다.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심기가 아주 많이 불편해지곤 한다. 괴산살이를 시작한 이후에 만나게 되는 사람들 중에는 인격을 무시하는, 무례한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 사람들과 맞닥뜨리게 되면 난 뭔가 뜨거운 게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걸 느낀다.


나의 이런 과잉반응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들의 능력이나 진실성을 자기 기준에 맞춰 마구 폄하하는 말들을 아주 쉽게 해 놓고 그것이 잘못인지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거의 꼭 발현하는 거 같다. 자기 합리화를 대놓고 하는 사람들, 즉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을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걸로 정당화시키려는 사람들과 마주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어쩌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가 그런 점을 지적하면 완강히 거부하거나 내가 선생질을 한다며 되려 내게 화를 낸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야 나서 난 비로소 문제를 직시하게 되었다. 나의 예민한 반응과 그 표현이 아무리 정중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해도 관계를 망쳐버릴 수 있음을... 그걸 미처 깊이 인식하지 못한 나의 부족에 부끄럽기까지 하다. 맞다. 민감한 내 반응에 기반한 나의 부정적 언행들이 문제인 거다.


아무리 전문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일어나는 반응이라 해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부정적 흐름을 밖으로 흘리면 상대방을 다치게 하고 종국에는 관계를 망가뜨린다. 얼굴에 드러나는 싫은 표정 혹은 짜증 섞인 말투와 선생님 톤으로 지적질하기 등 로인 것들이다.


그래서 나의 화두는 일상 속에서 언어에 대한 인식이 너무 다른 이들과 소통해야 다시 말해 상대방의 언행이 마땅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어떻게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로 바뀌었다. 지속적인 소통을 그것도 바람직하게, 싫은 표정이나 지적질 언사 없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다.


그러므로 내 과제는 다른 사람의 부적절한 언행과 마주칠 때 내 반응을 스스로 인지하면서도 상대방의 언행을 굳이 문제 삼지 않을 만큼 초연할 수 있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의 과도한 반응이 그들에게 드러나지 않고 나의 기준이나 감정을 그들에게 들이대지 않으려면 내 틀이 좀 더 유연해져야 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그 틀의 유연함은 사고와 행동이 일치되었을 때 그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을 거라는 것도 재확인했다. 내 사고방식과 언어 패턴에 대해 좀 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섬세한 관찰 결과, 내게 부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말과 문장이 좀 더 선명해졌다. 그래서 내가 싫어하거나 나를 불편케 하는 말들, 나 스스로 금기시했던 강력한 단어 혹은 개념들과 직면해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의 터부 단어는 죽음이다. 죽음은 무조건 불길한 거고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다고 믿어왔다. 하여, 그 단어를 입에 담지도 귀에 넣지도 말아야 한다고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주의를 잔뜩 주곤 했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요즘 흔들린다.


최근 근거리에서 지켜보게 된 한 이웃이 죽음과 아주 친하게 살고 있는 걸 알게 됐다. 그녀의 삶의 방식에서 난 견고한 위안과 건강함을 느꼈다. 얼마나 진실일지에 대한 의혹은 그다음 문제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자기 생각을 갈파하는 거 같았다.


그래서일까? 어차피 피할 수도 없고 피할 필요도 없는 거라면 가까이 친근하게 대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나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가 마주할 나의 죽음에 대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개념이든, 실제의 현상이든, 내게 가장 커다란 거부 반응을 일으키던 죽음이란 단어와 친해지면서 그 보다 덜한 부정적 단어나 표현에 훨씬 덜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 알아차렸다.


툭툭 내뱉는 문장에서 부정적 전제가 감지되어 내 레이다에 걸려들던 언어 패턴도 내게 더 이상 귀의 가시가 되어 아프게 찌르지는 않는 것 같고 어떤 성향의 사람과도 비교적 마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더 좋은 건 내 민감한 감수성에 대한 변명이나 설명을 할 필요가 현저히 줄어든 거였다. 아니 나아가 좀 불편할 수 있는 성질의 대화도 부드럽게 곰삭은 가을 고추처럼 잘 익은 맛과 향이 나는 대화로 이어가는 경우도 이따금 생겼다.


의사소통의 묘수? 많이들 얘기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 해결을 제시하는 걸 아직은 듣지 못한 것 같다. 아마도 이건 기술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면서 뱀같이 지혜로울 만큼, 내 진실성도 잃지 않고 상대방도 존중할 수 있는 방식을 모색하려면 결국 내가 성장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렇다. 나답게 사는 게 무언지 선명해지면 그래서 나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이 확실하면 상대방의 언행에 그리 쉽게 휘둘리지는 않겠지. 또 그 감정에 영향을 받아 내 생각이 그렇게 간단히 휘저어지지도 않고 말이다. 당연히 내 표정과 언어의 톤도 상대방에게 그리 불편하게 나아가지 않게 될 거고.


특히,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마음에 들지 않는 대화를 계속하려면 결론은, 내가 성장하여, 상대방이 어떤 세상 모델을 보여줄지라도 그대로 존중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거다. 그렇다. 결국 의사소통의 묘수는 기승전 나의 성장과 타인에 대한 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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