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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키 Oct 19. 2022

회색지대에 머무르는 힘

혼돈과 불투명한 상태에서 뭉근히  

난 사실 멋지게 성취한 얘기를 쓰고 싶었었다. 바닥을 여러 번 쳤음에도 어떻게 다시 일어나 독수리처럼 기운차게 하늘로 솟구쳐 올라 내 포부의 정점을 향해 창공을 날다가 어떻게 저 높은 곳에 도달하게 됐는지를 소상하게 알려주고 싶었었다. 아님 적어도 어떻게 터널을 빠져나와 눈부신 햇살 아래서 신명 나게 춤출 수 있게 됐는지를 뿌듯한 마음으로 들려주고 싶었었다.  


그런데 난 아직 유영하는 독수리는커녕 이름 모를 작은 새의 날갯짓도 어려워하고 우아한 몸짓의 춤추기는커녕 무리 없이 걸음을 옮기는 거조차도 쉽지 않은 지경에 처해있다. 그렇다. 이건 정말 당황스러운 직면이다.


난 여전히 바닥에서 기고 있는데 내 속에서는 글을 쓰라는 지상명령을 내린다. 뭘까? 이상이 아니 몽상이 현실로 되는 일은 어차피 요원한 걸 테니 초점을 바꾸라는 걸까? 글쎄다. 그건 정말 모르겠지만 내면의 또렷한(?) 소리를 더 이상은 무시할 수 없어 그냥 따르기로 한 거였는데. 자꾸 민망한 변명과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가 안쓰러운 건 뭔 까닭일까?


아. 가만있어 봐. 내가 안쓰러울 이유가 뭐야? 너무 애쓰는 거 같아서. 아니 그럼 애쓰지 않고 되는 일이 세상에 어딨다고?  아직도 철딱서니 없는 삶의 태도에 기대어 꿈꾸는 거니? 나의 어리석음을 아니 오만을 툭툭 털어낸다.


익숙지 않은 날갯짓을 계속하는 게 대견하고  서툰 목발 걸음을 투덜거리지 않고 찬찬히 옮기는 게 기특하지 않은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요즘 내 일상을 나만은 세세히 목격하고 있잖은가? 진하게 살아온 날들의 경험을 제대로 정리해 보려고 다른 방식을 끊임없이 시도해 가며 뭉근하게 기다리는 거 말이야. 내가 늘 숭상하던 삶의 멋진 자세 아니었던가? 맞다. 그럼, 기운 나게 해 줘야지. 그렇다. 최고의 토닥거림은 존중이다.  


측은지심을 나에 대한 예의로 바꾼다. 인내심의 기다란 시간선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말이다. 그 힘겨운 싸움의 나날이라도 기록하는 건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다.   


절실함과 의연함을 꼬아서 만든 곡예 줄을 타고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나날들이다. 결국 어젯밤에는 기어코 눈물 몇 방울을 떨구고 말았다. 한참을 그냥 호흡만 했다. 멍 때렸다.


그느므 희망의 끈, 그냥 놓으면 간단할 걸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붙잡고 있는 건지. 힘이 없어 꼭 잡지는 못해도 그냥 붙들고만이라도 있겠다는 걸 어쩔 건가.  그걸 그냥 높이 사기로 한다.




내가 일하는 영역(심리치료 혹은 자기 계발)에서는 모두들 성장과 성숙과 성취를 얘기한다. 나도 보통은 그런다. 그리고 성공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변화와 변혁을 갈파한다. 나도 대체적으로 그런 일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난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그런 어쩡한 상태에 머물 수 있는 힘이다. slow thinking을 하고 천천히 살기를 지향하며 잠깐 멈추기를 실행할 수 있는 동력 말이다.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머물기만  하는 것도 꽤 괜찮은 거라고  나를 달랜다. 내가 좋아하는 말, 스텝핑 스톤, 그 징검다리를 건너는 순간들을 마음속에서 기꺼이 연장하는 거다.


슬로우 모션으로 아주 천천히 움직임을 만드는 거다. 그러면 시간과의 타협도 조금은 더 수월해질 거라고 나를 설득한다. 흑인지 백인지 결정하기 전에 회색지대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무는 거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기를 시도하는 거다.


물론 안다. 흑백 논리가 내포한 선명함을. 대한민국도, 나도 이 만큼 되기까지에는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와 뜨겁거나 차갑거나 둘 중의 하나로 노선을 명백하게 정리해서 무섭게 경쟁하면서 일해왔기 때문이라는 걸. 아마도 오히려 그래서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는 우리도 잠시 멈춰서 숨 고르기를 할 만큼 되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앞으로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차분히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냐고. 함께 달리는 주변인들을 품으면서, 다양한 결과를 즐기면서 살아 볼 만큼의  여유를 우리가 가질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꼭 창공을 날거나 현란한 춤사위로 퍼포먼스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질박한 행복감에 취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안다. 사실 많이 달라지긴 했다는 걸.  


합창 퍼포먼스를 즐기고 청년들의 댄스 배틀에 환호하면서 세계적 클래식 연주가들을 배출해 내고 국제 골프대회에서 10위 안에 네 명의 대한민국 남자 선수들을 올려놓는 대한민국이지 않은가. 영화도 드라마도 대중음악도 클래식도 운동도 심지어 음식과 화장품, 패션까지 모두 K를 앞에 달고 전 세계를 휘젓고 있음을. 그건 일류만 쫒기보단 실험과 도전과 경계선을 넘나드는 용기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층이 두터워지고 그를 키우는 토양도 비옥해졌다는 방증일 테니까.


가만히 견주어 보니, 나도 참 많이 달라지긴 했다. 세상 겁 없이 충동적이고 성급했던 내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집수리 현장을 목발로 찬찬히 조심스럽게 느긋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니컬한 글감들에서 공감과 유머를 발견하고 마냥 부러워하면서 깔깔대고 있으니 말이다. 부러우면 지는 게 아니라 언젠가는 그게 내 거가 될 수 있다는 거니까. 나도 때로는 따뜻하기도 때로는 냉소적일 수도. 후후 좋다. 변덕을 부리면서 이리 편한 마음이 되다니.


문득 안도감이 든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냥 머무르면서 숨 고르기를 하는 이 회색지대에서는 나를 다그치치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결정 내리기 전에, 선택하기 전에, 천천히 또박또박 배워야 할 거 투성이인 세상을 천천히 둘러봐도 되겠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인다. 배움에 관한 한 나는 Slow Learner (천천히 배우는 사람)이지만,  Learning Junkie (배우는데 미친 사람)다. 그런 의미에서 난 세상에 잘 태어난 거 같다. 성급하긴 해도, 명확하게 한쪽을 빨리 택하지 못해도, 버틸 수 있는 성품을 잘 키우고 있으니까.


아직은 언저리에서 서성이고 있지만, 목조 게이트를 설치하고 주황색 지붕에 걸맞은 색들을 배합하며 페인트 칠하는 내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 좋다. 회색지대가 몹시 멋스럽게 여겨진다.


세련된 멋을 은은히 풍기는 회색은 흑과 백을 모두 품은 넉넉함이다. 나도 은근히 그렇게 되길 기대하며 오늘도 그레이 존에서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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