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키 Nov 05. 2022

글쓰기의 표면적 동기

의식의 다른 층에 숨겨진 동기가 아마도 꽤 더 있을 거다.

어수선하고 장황한 글 꼭지 몇을 발행하고는 기회 닿는 대로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지루하게 늘어진 부분들은 수정 혹은 삭제하면서 가능한 문장을 짧게 한다. 나아가 주제에 긴밀하게 들어맞지 않는 문단들은 과감하게(?) 잘라내고 있다. 잘라낸 글의 파편들 중, 버리기 아까운 것들을 헤쳐 모여! 해서 앞으로 내가 쓰려는 글 꼭지에 끼워 넣으려 작가서랍에 저장해 두면서 말이다.


지금 이 글은 이미 발행된 글에서 잘라낸 글이었는데 관련 있는 생각을 덧붙여 위의 제목으로 되살려 내려는 중이다. 본 적 있는 글을 다시 읽게 되는 독자들께는 아주 많이 죄송하다.


내 글쓰기에는 두 개의 표면적 동기가 함께 한다. 그 하나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듯한 내 정서 상태와 정신 작용, 그에 따른 행동 패턴을 중심으로 한, 나에 대한 탐구다. 또 다른 하나는 오랜 꿈의 실현인 책 만들기다. 끊임없이 포착되는 모순 투성이의 내 경험을 살펴봐야겠다는 현실적 당위성과 이제야 말로 조용히 문장을 다듬어 볼 때라는 정신적 여유가 그 바탕에 깔려있다.


나는 늘 두 마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듯싶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물건들에 매혹되는 마음이 그 하나이고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을 추구하는 지적 탐구가 또 다른 나의 마음이다. 그리고 고독한 자유로움과 따듯한 공감이 주는 위안 사이를 들락날락한다. 간결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선호하다가도 가끔은 애매모호한 은유에 폭 빠지기도 한다. 내 글이 그냥 좋다는 제자가 이뻐 죽겠다가도 신랄하게 비판의 날을 세우는 친구의 의견에 감탄하며 존경한다. 내 글의 의도에 초점을 맞춘다는 내 제자의 따뜻한 마음도, 쓴소리 아끼지 않는 내 친구의 용기도 내게는 모두 고맙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압축과 비약과 생략의 미가 잘 드러난 문장을 쓰려고 밤새 끙끙거리다가도 순식간에 대충 묘사한 내 마의 세세한 풍경에 아주 가끔은 잠깐 도취되기도 한다. 사회적 문화적 임팩트가 강한 영화를 최고로 치다가도 달콤하고 은은한, 사람 향기가  풍겨 나는 멜로드라마에 온통 정신을 팔도 한다. 내 언행의 예기치 않은 파장에 놀라면서 겪는 경험도 모순적이다. 스스로의 당혹감을 음미하는 괴팍한 성향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 당황스러워하다가 또 몇 치 앞을 정확하게 예측한 내 선험적 능력에 뿌듯함을 느낄 때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오류 투성이의 나의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에 공통으로 드러나는 한 가지 소망이 있으니 그건 나이 들은 이의 넋두리로 치부되지 않을 만큼 만이라도 인정받는 내 얘기를 써보고 싶다는 거다. 갈등의 원인과 결과, 고통의 색깔과 질량, 그리고 그 과정으로 점철되는 삶의 바닥까지 내려가 들춰내고 묘사해 보는 묘한 쾌감을 맛보고 싶은 거다. 삶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해부학적 예리함과 사람들을 홀딱 빠트릴 필력을 그래서 추앙한다.    


브런치에서 글 서핑을 하다가 알아차렸다. 내 특유의 감성과 생각들이 사실은 얼마나 보편적인 건지. 현타였다. 실망감과 안도감을 함께 품은. 그리고 오만과 편견울 조금씩 벗겨낸다.  요즘 기쁨의 근원이 내 착각들을 짚어내는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책 하나 내도 될 만큼 잘 살면 되는 줄 알았다. 어리석게도, 언어를 배우는 일은 예전에 끝난 줄 알았다. 공부만 많이 하면 글은 저절로 써지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글쓰기는, 그걸 위한 삶의 질료도 중요하지만, 그걸 어떻게 묘사하느냐 즉 어떤 언어를 가지고 있느냐가 관건임을 다른 이들의 좋은 글을 읽으며 새삼스레 절감했다. 좋은 글들은 격이 달랐고 읽는 맛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특별했다.


사람들이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연습을 하지 않아서라는 걸 어디에선가 읽은 거 같다.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는 거 역시 좋은 생각이 없어서나 다채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걸 어떤 언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지 훈련이 덜 되어서라는 걸 이제야 제대로 알아차린 거다. 또 하나 확실하게 알아낸 건 모든 살아낸 삶은 다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거다.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닦아내는 눈과 손의 유무가 그 삶을 조금 다르게 보이게 할 뿐이라는 거를 깨달았다.


후회라는 말 참 싫어했었는데, 진짜 후회하면 같은 짓을 반복 않겠다는 다짐이 진짜 생긴다는 것도 알았다.  본말이 전도된 소망. 책 하나 써낼 만큼 잘 살겠다, 탓에 내 언어를 갈고닦는 일에  완전히 비켜서 있던 세월이 너무 아까워 가슴이 쓰릴 정도다. 그래도 자책하지 말자며 이 안타까움을 성실함의 동력으로 삼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제부터라도 다른 씨름을 하면 된다고 나를 토닥인다. 서로 이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반된 내면의 관점들도 선명하게 드러내고  영글어가는 아이디어들을 열린 공간으로 끌어내기로 한다. 시간과 공을 어디에 어떻게 들이면 되는지 조금 알 거 같아  뿌듯한 요즘이다.


이 강렬한 열망을 어떻게 이제까지 뭉뚱그려 덮고 살아왔었는지. 허망한 성공을 위한, 가상스러운 그동안의 나의 노력에 연민의 눈빛을 보낸다. 무얼 쫒느라 그리 부산스러웠던 건지.


내가 지금 지혜롭게 선택해서 적용해야 되는 또 다른 하나는,  삶의 우연을 하나님의 섭리로 혹은 우주의 깊은 뜻으로 해석하면서 내가 굳이 뭔가 하려는 걸 극도로 꺼렸던 삶의 태도다. '케세라 세라'의 정신과 '냅 둬!'라는 말로 상징되는 '렛 잇 비'와 '렛 잇 고우'의 자세 말이다. "Make it happen"과 "let it happen"의 선택적 적용에 더욱 선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게 온 사람들은 대부분 과도하리만큼 철저히 삶을 통제하려고 애쓰고 있었기에 난 더욱 반대의 태도를 강조하며 살았던 거 아니었을까 싶다. 묘하게도, 난 늘 일을 꾸미고 도모하는 사람으로 비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아무튼, 뭔가를 이루는 거에서 어떻게 제대로 나답게 살아갈 건지에로 초점이 바뀌었으니 천천히 어떤 꿈을 꾸었었는지 되짚어 보려고 한다. 힘없이 당하기만 했던 우리 선조들의 무능력과 고초가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 펑펑 흘리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그런 역사를 물려줄 수 없다고 결의에 차 있던 초등학교 6학년 국사 시간의 내 모습이다. 그때의 그 기개를 되살려내고 싶다. 동네 어른들의 싸움을 말릴 만큼 힘 있고 정의감 뛰어났던 꼬맹이 내 모습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 힘을 되살려 내 일상의 삽화를 진솔하게 그려내고 촘촘히 엮어내는 글을 써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바닥을 치고 일어서려는 지금의 내가 어린 시절의 꿈을 깃대 삼아 다시 솟아오를지도 모를 일이니까.


작가의 이전글 새로운 프로젝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