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당한다고 생각 들면, 사람들은 억울하다고 느끼며 세상을 원망하다가 결국은 아주 냉소적으로 바뀔 수도 있을 거 같다. 난 그런 수순을 밟고 싶지 않았다.
시니컬함을 매력으로 치부하던 때는 사춘기 시절,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작가의 연애 소설 읽을 때, 잠깐 뿐이었다. 체질적으로 잘 맞지 않거나 아님생리적으로 상극인지 난 차가운 건 질색이었다.
2018년 봄, 상담을 계속하고 싶으면, 상담료를 모두 토해내라는, 내담자 남편의 협박 전화를 받았었다. 제주도에서였다. 그런 일이 내게 생길 줄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그냥 얼떨떨하기만 했었다
거의 동시에 한 수강생이 나를 사기꾼으로 몰아갔다. 학생과 따지며 싸우는 꼴을 보이기 싫어 전체 학생들에게 수강료를 환불해 주고 강의를 중단했다.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어 하는 그 수강생의 친구와 다른 수강생들이 있었다는 건 나에게 그나마 큰 위로였다.
"아~ 이렇게 어이없이 당할 수도 있는 거구나". 기가 막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그 빌미를 제공한 것도 있지 않았을까 싶어 완벽하게 처신하지 못한 내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어찌 됐든 시시비비에 말려드느니 내가 지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난 그들과 시끄럽게 싸우는 것도 내가 냉소적으로 변하는 것도 다 택하지 않았다. 선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세상을 바라보는 걸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속 시끄러움을 모두 잠재우고 결국 내가 졌음을 인정했던 거였다.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집부려 시작한 제주 센터에서의 일은 놀이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링 위의 난타전 같이 되어 버린 거였다. 난 원치 않는 펀치를 주고받고 싶지 않았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얼른 링 밖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래서 깨끗이 하얀 수건을 던져 항복을 선언했었다. 완전한 항복(Total Surrender)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나를 추스를 시간과 공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 주효했는지 놀랍게도 머릿속도 몸도 예상보다 훨씬 가볍고 편했다.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한 휴식을 어부지리로 얻었다. 상황의 틀을 바꾸어 해석과 의미를 달리하고 심호흡을 하면서 다른 경험을 했다. 예기치 않았던 휴가를 즐기며 징검다리를 찬찬히 건너기로 했었다.
그리고는 결단을 내렸다. 가족과 집이 있는 아일랜드로 돌아가기로. 한국에서 내 꿈을 펼쳐 본 거 그 자체가 내겐 큰 수확이었다고 나를 달래면서 말이다.요행수를 바라지도 않았고 꼼수를 쓸 생각은 더욱이 없었다. 가장 정직하게 상식적으로 수습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다 잃었고 빚쟁이가 되었다.
제주를 떠날 무렵, 내 의도와 언행을 귀하게 여겨주는 수강생들과 내담자들이 나타나 훗날을 기약하고 싶어 했던 건 그나마 큰 위안이었고 일말의 희망을 내게 남겨 주었다. 언젠가 그들을 다시 만날 거라고 믿으면서 한결 가볍게 떠날 수 있었다.
그해 다시 돌아가 맞이한 아일랜드의 여름은 특유의 길고도 선선한 날씨로 일관되었다. 난 그 여름 내내 두꺼운 스웨터들을 번갈아 꺼내 입고 지냈다. 마음의 추위가 내 몸을 더 으슬으슬하게 했었던 거 같다. 내 가족들과 미해결 업무들을 풀어나가느라 바쁜 와중에도 어쩌다 이어지는 한국 지인들과의 연결은 6년 근 홍삼보다 더 활기찬 기운을 내게 일으켰다.
호주로 연수를 떠난 예전의 수강생 하나는 어느 가을밤, 한밤중에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와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나와 함께 공부하고 배우며 성장했던 것이 자기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 주고 있는지를 내게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기쁨과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면서. 나도 기쁘고 고마워 함께 울먹거렸다.
내게 상담받아야 될 사람들을 종종 보내 주는 내담자의 엄마가 기다란 카톡을 보내어 나를 기다리고 있노라고 했다. 내게 상담받았던 자기 아들의 변화가 자기 가족 모두의 삶을 얼마나 커다랗게 바꿔 놓았는지를 끊임없이 주변에 퍼뜨리는 사람이었다. 또 있었다. 스카이프 영상통화로 혹은 카톡 영상통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자기 삶의 변화를 시시각각 나와 함께 나누는 젊은 내담자들은 내가 떨어져 있는 바닥의 온도를 견딜만하게 유지시켜 주었었다. 한발 한발 자기가 꿈꾸던 삶에 다가서고 있는 그들 모습이 내게는 터널 끝을 믿게 만들어 주는 가이딩 라이트였다.
그랬다. 그때 배웠다. 인생이란 게, 일이란 게 다 실패만 할 수도, 다 성공만 할 수도 없는 거라는 걸. 자디잔 실패와 성공을 그 이전이라고 왜 안 겪었겠는가. 그러나 5년 전 일련의 사건들은 정신이 번쩍 들 만큼 나를 후려치는 커다란 한방들의 집합체였다. 5년 전의 항복이, 그 뒤를 따르던 짧은 달콤함이 지금 이 시점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건 무슨 까닭인지. 지금 나의 휴식이 그때와 다른 듯 닮아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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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삶도, 시대의 트렌드처럼, 반복적인 사이클이 있나 보다. 단지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빙빙 돌면서도, 결국은 저 높은 곳을 향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