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냥 해줘

by 도토리

"엄마 오늘은 별일 없었어?" 오랜만에 아이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따뜻한 말에 무엇이든 말해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마저 든 저녁식사 시간. 최대한 아이가 호기심을 가질만한 일을 꺼내서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사춘기 아들을 둔 엄마의 마음으로 눈을 크게 뜨고 하루를 돌아보니 퇴근 무렵에 사무실로 걸려온 한통의 전화가 떠올랐다.


무척 앳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학부모님의 전화였는데 사정을 듣고 보니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내가 맡은 업무가 아니었고 업무 담당자가 아니면 답할 수 없는 법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퇴근 시간이어서 담당자 연결도 어려운 상황이라 내일 오전 중으로 관련 업무 담당자를 알아보고 연락드리겠다는 말로 전화는 마무리 됐다. 퇴근 직전 걸려온 그 문의는 다소 무거운 내용이어서 내 퇴근길 걸음도 함께 무거워졌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 <안타카레니나>의 그 유명한 한 문장처럼 불행한 가정 속 아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에 자주 놓이게 된다. 교육청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싶은 일들이 많아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이런 이야기를 넋두리하듯 쓰게 쏟아내고 있는데 아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거 엄마 일 아니어도 엄마가 그냥 해줘." 아이의 예상치 못한 말에 작동이 잘되던 내 머릿속에는 빙글빙글 원이 움직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일까?' '정답은 못 찾아도 내가 도움말 정도는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교육청까지 문의를 한다는 것의 전제는 일단 학교는 다 문의를 드려본 상황일 테고 그럼에도 뾰족한 답이 없어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아이의 말에 "아니. 그건 내일이 아니야."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에게서 특수 임무를 받은 나는 임무를 수행할 계획을 세우고 다음날 출근했다. 업무 분장을 보고 담당자일 것으로 생각되는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난감해하며 당신도 모르는 부분이라서 답이 어렵다고 했다. 법과 관련된 부분이라서 국가법령센터에서 관련 법을 살펴보다가 의문점이 생겨 교육청 소속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님 역시 법률에 분명하게 나온 게 없다고 했다. 법과 관련된 부분으로 계속 연결이 되니 어느 순간 이거 괜히 오지랖이 아닌가 싶고 답변을 하려고 애쓰다가 괜히 내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은 아지 걱정마저 들었다.


그때 문의를 드렸던 분들이 하나둘 자신의 업무와 연계된 부분들에 있어서는 참고하라며 자료들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길가의 작은 돌멩이가 모여 소원을 이루는 돌탑을 쌓듯이 답변이 완성되어 갔다. 법률이라 정확한 답변은 못 드려도 최대한 알아본 내용을 정리해 보고 전화를 드렸다. 전화를 받으신 학부모님은 거듭 감사하다며 말씀하셨고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더 이야기해 주셨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학부모님께 정말 혼자서 수고가 많으시다는 짧은 위로를 드리고 일은 잘 끝났다.


어릴 적 받아쓰기 100점을 받고 엄마한테 보여주고 칭찬받을 준비가 되었던 나처럼 이에게 그날 저녁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어제 네가 해달라고 한 거 했다." "엄마 고마워." 아이와의 약속을 지켜낸 내가 그 순간 퍽이나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누구에게나 지키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준다. 전화를 학부모님도,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한 나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기에 조금 더 세상을 렇게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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