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좀 할만해?

by 도토리

장학사로 전직을 하고 세 번째 기관으로 부서를 옮겼다. 3년째 9월 1일마다 겪는 이 예고 없는 일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렇지가 않았다. 한 해의 반이 지난 시점에서 옮기면 적응하는데 품이 많이 든다. 매번 바보 멍청이가 된 기분을 느낀다. 완전히 새로운 업무를 하게 되고 이미 익숙하게 자리 잡은 조직의 문화에 새로이 들어가는 가는 일은 두 하복을 입고 있는데 홀로 두툼한 동복을 입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함을 준다. 다행히 평소같이 근무해보고 싶었던 좋은 분들이 많이 있고 환대를 해주셔서 마음은 편했지만 이미 도교육청 장학사 생활을 저 경험한 선후배들이 힘든 곳이니 건강 먼저 챙겨야 된다며 걱정해 주는 말들이 더해져 가기 전부터 긴장감이 밀려왔다. 남들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노력하면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배짱도 땡볕의 얼음처럼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고작 한 달이지만 그 시간이 쉬운 시간은 아니었다. 전혀 다른 스케일의 일이라 놀라는 일이 잦았다. 업무 파악도 안 되어 있는데 며칠이내 억 단위의 예산을 규모 있게 짜내야 했고, 익숙지 않은 서류들을 작성해야 했다. 뉴스에서나 보는 국정감사를 위한 자료들을 준비해야 했고 태어나 처음으로 국회의원실로 자료를 발송하며 틀리지는 않았는지 거듭 문서를 확인해야 했다. 일의 규모와 책임감이 그동안 거쳐온 직속기관이나 지원청과는 사뭇 달랐다. 그런 하루를 위로해 주는 순간은 역시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엄마야?" 문이 열리는 소리에 들려오는 아이의 소리는 내가 집에 왔다는 시그널이다. 퇴근이 늦어지다 보니 매번 미안하기만 한데 아이는 늘 그렇게 나를 기다려준다.

"엄마 일은 좀 할만해?" 아이는 또래답지 않은 이 말을 오늘 날씨는 어때? 수준으로 내게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오래된 휴대폰 화면에 인터넷 창이 열리듯 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웃고 말았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이는 그 뒤로도 일주일에 한 번은 내게 일은 할만하냐고 여러 번 물어봤다.

아이가 걱정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할만하다고 늘 얼버무렸지만 할만한지 안 한 지는 따질 수 없었던 그냥 치열했던 한 달이다.


이제 일은 좀 할만해졌다. 익숙하지 않은 큰 금액의 예산을 짜는 일도 긴급을 단 메시지를 확인하고 재빠르게 감사 자료를 만드는 일도 교육부 연구사님들과 연락하는 일도 이젠 제법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출장을 학교로만 다니다가 서울 출장을 다니게 됐다. 시험기간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일 저녁은 네가 알아서 먹어야 한다고 단속을 하는데 아이가 나를 쳐다보면 말했다.

"오. 엄마 그럼 엄마가 도 대표야?"

'도 대표?' 순간 출장을 서울까지 가야 돼서 소란스럽던 탁한 마음에 웃음이 들어오면서 가벼워졌다. "듣고 보니 도 대표네!" 도대표인 나는 무사히 출장을 잘 다녀왔다. 내 업무에 있어서 만큼은 도 대표니 최선을 다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이의 말에 내가 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고 싶어졌다.


니체는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고 했다. 아이의 말에 나는 왜 일하는지를 알게 됐다. 앞으로 어떤 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배짱 다시 모아 본다.

아이가 언제고 다시 일은 좀 할만하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감 있게 말해줄 것이다.

"할만하지! 엄마 열심히 하고 있어."

'이게 뭐지?' 하는 물음표의 시간을 '이거구나!' 하는 마침표의 순간들로 만들 가고 있다. 마침표의 시간들을 커피숍 쿠폰처럼 하나씩 모으다 보면 진짜 도대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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