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다시 만나는 일

by 도토리

아이가 친구를 만나러 나간 방에 불이 켜져 있어 불을 끄러 들어갔다. 급하게 나갔는지 여기저기 옷가지들이 흩트러져 있어 한숨을 내쉬며 치우기 시작했다. 침대의 이불을 정리하다 보니 침대 가장자리 공간이 쓰레기통이었다. 돌돌 말린 아이의 양말, 과자봉지, 볼펜, 만화책의 표지와 작은 인형들까지. 그대로 두고 돌아서기에는 지저분해서 늦은 저녁 침대를 밀어가며 청소를 시작했다. 쓰레기만 치우자는 마음이었는데 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침대 밑을 청소하면서 침대의 위치까지 바꾸게 된 것이다. 손으로 밀어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 침대를 발로 밀어가며 기어이 침대의 방향을 바꾸고 마무리로 이불정리까지.


침대 주변 정리를 끝내고 방을 둘러보니 침대 맞은편 책꽂이가 정리된 침대와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고1이 되는 아이 책꽂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초등학생 때 책이 가득 꽂혀있었다. 이제는 책을 정리하고 지인에게 나눠주기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꽂이 정리를 시작했다. 책을 정리하는 순간 내 눈앞에 거대한 추억의 스크린이 펼쳐진 기분이 들었다. 너덜너덜해진 영어 그림책에서는 아이와 깔깔거리던 순간이 펼쳐졌고, 아이가 좋아했던 코드네임 시리즈 책의 빛바랜 책등이 아이가 낄낄거리며 웃던 시절로 시간을 되감아 주었다. 너무 낡은 책들은 버리고 지인에게 줄 책들을 고르는 동안 책꽂이 한켠에서 사은품으로 받았던 검은색 2021년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아이에게 주었던 기억을 잊고 있었는데 펼쳐보니 놀랍게도 아이의 그림일기장이었다.


아이의 사생활을 지켜줘야 한다는 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평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아이는 그림일기처럼 재미있게 일기를 써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 그리웠던 아이의 순수한 표현들에 기억이 새록거렸다. 귀여운 그림체와 맞춤법 틀린 빼뚤빼뚤한 글씨에 웃다가 목울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고 눈물이 차올랐다. 귀엽다고만 느낀 아이의 일기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었다.


당시 4학년이었던 아이는 노트북에 차를 쏟아 수리를 맡겨야 했던 나,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끝나서 아쉬워하던 나, 지인들과 함께하는 내가 있었다. 내 주변을 행성의 위성처럼 맴돌며 나를 살폈을 아이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아이는 내 보호자처럼 평범하고 다소 지루하기까지 했던 내 하루를 옆에서 함께하고 마음을 쓰고 있었다. 아이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다정한 관찰자였다. 모든 부모가 어느 한 시절에는 아이라는 세상의 전부을 것이다.


아이 덕분에 나도 잊었던 그 기억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억에 대해 말하자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다시 만나는 일이라고 한다. 아이의 일기는 가장 힘들었던 시절의 내가 그 시절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얼마나 내가 지인들과 아이로 위안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그 시절이 주었던 위안이라는 감정 되살아나게 했다. 연말 아이가 다시 만나게 준 기억들은 지금의 나에게 최고의 위로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