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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Aug 27. 2021

밝은 밤

나와 경험이 다른 허구의 인물을 통해서 삶의 다양한 모습을 간접 경험하고 인간에 대한 공감력을 높이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이라면 이 소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 주변 억눌린 여성의 삶에 대해서 여느 책 보다 독자들에게 마음으로 먼저 다가간다.


최은영의 신작 '밝은 밤'은 누구의 딸이기도 엄마이기도 친구이기도 했던 1세기 동안 이 땅에 살았던 여성들, 백정의 신분이었던 증조모, 할머니, 엄마, 나로 이어지는 한 가족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여성이기에 겪었을 일, 겪어야만 했을 일들이 각 인물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과 어울리며 각 인물과 얽혀서 펼쳐진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여자로 태어나고, 여자로 산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살아가는 증조모와 할머니 그리고 시대가 흘러서도 여전히 여성이기에 겪는 일들에 마음이 불편한 엄마와 나. 한 세대 한 세대를 걸치며 때로는 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다른 모습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네 여성은 모두 남편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기보다는 기대를 완전히 버린다.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며 딸을 위로하는 엄마를 보며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상황을 인정하면 마음에는 여유가 생기지만 슬픔이 밀려온다. 그래서 체념이라는 단어가 슬픈 것 같다. 이 여성들이 주는 체념은 바닥까지 내려앉아 어둡고 힘들었던 세대를 넘나들며 여성의 치열한 삶을 그려낸다. 세상의 일들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상처에는 크고 작음이 없고 삶의 그림자에도 더 어둡고 작음이 없다지만 이 소설 속 여성들의 삶은 우리의 아픔보다 훨씬 크고 깊게 느껴진다. 


'고통은 시간 안에서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이 소설 속 한 문장처럼 네 명의 여성들의 삶의 고통은 직선으로 흐르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흐르는가 싶다가도 다시 되돌아오고 그러고는 멈춰 서기를 반복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런 고통 속에서 이 여성들로 하여금 삶을 지켜낼 수 있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이었다. 백정 신분인 증조모를 아무런 편견 없이 대해주고 챙겨준 새비 아주머니의 우정, 피난 증조모 가족을 받아준 명숙 할머니의 투박하지만 넘쳤던 사랑,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서로와 함께 지냈던 시기라고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희자와 영옥. 서로가 서로에게 내어준 어깨가 서로를 살게 했다. 

사람으로 겪은 상처는 결국 사람으로 치유되고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도 결국은 그 사람으로 인한 추억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 '코코'에는 죽은 자들의 세상에 대한 비밀이 나온다. 이승에 있는 가족들 중 죽은 자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게 되어 더 이상 죽은 자를 기억하지 않게 되면 저승 세계에서도 완전하게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의 의미가 진짜 그러하다면 이 네 사람의 가족과 그 가족에게 가족 같은 존재였던 새비 아주머니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며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시대를 거듭한 네 명의 여성은 서로가 서로에게 심리적 CPR을 행하며 견디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과거와 현재를 잇고 현재와 미래를 잇고 다시 과거를 넘나드는 비선형적 기억법이 이 네 명의 인물을 살리고 살아가게 했던 힘이었던 것이다.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지난 한 세기 여성들만이 겪어야만 했던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의 한 단면을 실제적으로 보여준 소설이다. 이 소설로 많은 여성들이 세대를 넘어 자신의 상처와 대면했고 이 책의 인물들에게서 나와 같았음에, 나보다 더 힘들었음에 위안 받았을 것이다. 저자는 더 이상 이 이야기가 공감되지 않는 다음의 세대가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감히 짐작해본다. 사람에게 가열차게 기대하고 그 기대를 채우고 또 다른 기대를 할 수 있는 건강한 여성의 삶을 기대해본다면 아직도 먼 소망일 것인가. 이 책은 웅크린 채 자기의 감정을 숨죽이고 있을 과거, 현재, 미래의 여성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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